<감원태풍남의일아니다>3.말뿐인 구직.구인 안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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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기업들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최소한의 인력감축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감원태풍에 휘말린 실직자들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하면서 맛보는 사회적 여건과 무관심에 또한번 실망한다.
갑자기 실직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재취업.창업알선창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어렵거니와 물어물어 찾아가도 웬만큼 「입에맞는 떡」은 구하기가 또한 쉽지 않다.
이 마당에 재교육을 받고 이를 통해 새 일자리를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실직했을때 기존 봉급의 50%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며 월급에서 매달 꼬박꼬박 공제했던 고용보험도 상당수가 「자발적 퇴직자는 수여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단서조항에 걸려 한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성장일변도로 굳어져온 사회구조가 실직자 배려에 너무 인색한 것이다. 실효성 적은 구직알선제도,눈치만 보이는 친구.가족들은결국 실직자들을 서울 북한산등 주변 산으로,기원으로,공원으로 힘없는 발길을 돌리게 하고 있다.
퇴직자나 실직자를 위한 사회적 시스템 구축이 시급한 실정이다. ◇확충시급한 고용정보망=법무사 자격증 시험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K상사 과장 출신의 金모(41)씨는 정부나 민간의 구직알선기관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10여년동안 근무하던 직장에서 지난 3월 밀려나다시피 명예퇴직한뒤 구청의 구인.구직센터에 구직신청을 냈으나 담당직원은 구인목록을 몇개 보여주며 『알아서 찾아가 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목록에 적힌 일자리라고 해봐야 경기도 이천등 출퇴근이 쉽지않은 공장에서 숙식을 해야하는 생산직 자리등.자신이 「퇴물」취급받는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팠다.
시내 직업안내소를 찾아가 보았으나 『경비직.막노동 또는 월급60만~90만원 수준의 생산직밖에 없다』는 대답만을 들어야했다. 결국 선택한 것이 서울봉천동 고시원에 들어가 2년내 합격목표로 시작한 법무사 시험 준비.
심규범(沈揆範.한국노동연구원 부설 고용보험연구센터)연구원은 『노동시장 정보를 총괄적으로 다루고 전국에 산재된 국공립.민간직업소개 창구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종합고용정보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며 국내 구인.구직알선 창구의 활성화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부실한 고용정보시스템은 가뜩이나 좁은 재취업자리조차 수요자가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재취업의 문을 더욱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구직자와 구인자를 연결하기 위해 전국에 설치된 직업소개소는 지난 6월말 현재 국립 52개소,공공 2백87개소,민간 1천2백67개소등 총 1천6백6개소에 이른다.
이중 국립 52개소와 공공 1백여개소만 전산망으로 연결돼 있다.그나마 입력되는 정보가 빈약하고 단순 직업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실효가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구직자의 능력에 맞는 직업을 알선하기 위한 적성검사나 취업정보를 컴퓨터를 통해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는 창구등은 거의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 구직창구를 두드려본 실업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미국.일본등 선진국 직장인들이 취업알선창구를 통해 직업을 얻는 비율이 전체의 20%정도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겨우 5%대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
배진한(裵震漢.충남대 경제학과)교수는 「산업인력개발체제의 구축방안에 관한 연구」를 통해 『직업소개 창구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관내 유.무료직업소개소 인.허가 관리까지 함께 맡는등 전담직원이 크게 부족하고,민간직업소개소는 일용직 소 개에 주로 매달려 있어 직업안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명예퇴직자들을 더욱 목타게하는 것은 재취업 교육기관에 사무직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은 무척 드물다는 점.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인력양성과정의 경우 선반.용접.자동차정비등 기능사 양성과정이 주류다.특히 재취업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신규인력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어 이래저래 실업자들이 설 땅은 좁은 셈이다.
◇명예퇴직자에겐 실업급여도 그림의 떡=지난 7월 국책은행을 명예퇴직한 朴모(48)차장은 7월부터 시행된 실업급여에 대해 노동부에 문의하고는 낙심했다.관련 공무원의 답변은 「자발적 또는 징계에 의한 퇴직」의 경우는 지급받을 수 없다 는 것.
그는 『형식은 자발적이지만 진짜 자의로 직장을 나가는 사람이몇명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한후 그동안 봉급에서 꼬박꼬박 공제했던 고용보험료는 어디에 쓰이느냐고 푸념했다.
조한천(趙漢天)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지난해 7월과 올 7월부터 각각 시행된 고용보험및 실업급여제도는 당초 기대보다 직장인들의 실업위험부담을 크게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실직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실업에 따른 급여보장을 받도록 해 야한다고 지적했다. 최소한 자신이 낸 보험료 만큼은 혜택이 돌아가야한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실직자와 고용주의 의견을 면밀하게 청취해 명백히 타의에 의한 퇴직일 경우 명예퇴직도 실업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타의임을 입증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다.
고용보험사업은 고용안정.직업능력개발.실업급여등 3대 사업을 위해 시행된 제도.보험료는 사업주와 직장인이 절반씩 부담하고 있다.그러나 30인이상 사업장 종사원만 대상이어서 소규모 회사나 일용직 종사자들은 이 제도에 해당되지 않는다.
◇눈높이 조절 어려운 퇴출시장=지난 7월 기준으로 노동부 산하 구인.구직알선창구에 등록된 구인자수는 1만8천3백55명.반면 구직자수는 9천8백64명으로 외형상으로는 직장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직자중 취업한 수는 겨우 6.9%인 6백여명에 머무르고 있다.
구인자와 구직자의 기대수준에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올해초 Y전자 부장직에서 물러난뒤 한국경총이 운영하는 고급인력정보센터를 통해 구직에 나선 李모(54)씨.
그는 최근 한달여만에 5개 중소기업 인사담당자와 면접했으나 임금과 직책이 서로 맞지않아 무산됐다.
李씨는 2백여만원의 월급에 직책은 이사급을 희망했으나 중소기업들은 그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제시한 것이다.
이 센터에 구직을 신청한 1천5백여명중 20여명만 재취업이 이뤄진 것도 기본적으로 이처럼 「화려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것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이 이 센터 전대길(全大吉)소장의 견해다. 『기왕의 직책이나 업무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일자리를 얻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등실업자가 많은 현실에서 일자리를 기대보다 대폭 낮춰 고르지않는 사람들이 직업 물색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고 김동석(金東石.중앙고용정보관리소)소장은 분석했다.
그러나 재취업이나 고용안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불황.사회보장제도나 고용정보시스템.구직자 자세등으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노동계 견해다.
조한천 노총본부장은 『감원하지 않고 임금동결을 전제로 한 업무 나눠하기나 일시 휴직제,전직교육제도등의 도입을 통해 활황을준비하는 자세도 기업들에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이에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지금 기업이 겪고있는 상황은 무 척 심각하다』며 『근로자들도 우리 경제와 기업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솔한 이해와 협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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