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러시아권 신흥 부자의 행보에 새삼 다시 보게 되는 것이 러시아 전역의 문화유산들이다.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푸시킨 미술관, 명작 300만 점에 빛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말이다. 아브라모비치 등은 ‘졸부’가 아닌 ‘신흥 부자’들이다. 고대부터 근대 서구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 차르와 영주 등 왕족들의 전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파워 컬렉터들로 주목받고 있는 러시아 미술시장은 2004년부터 근대에서 동시대 미술로 그 관심사가 급선회했고, 이에 걸맞은 다양한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2007년 모스크바에서는 두 번째 ‘컨템포러리 아트 비엔날레’가 열렸고, 2008년 3월엔 제7회 ‘모스크바 사진 비엔날레’, 5월엔 러시아 대표 아트페어인 제12회 ‘아트 모스크바’가 열렸다. 옛 포도주 공장 자리에 갤러리 10여 곳과 작가 작업실들이 들어선 모스크바의 예술촌 ‘빈자보드’ 역시 컨템포러리 미술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는 로모 카메라의 탄생지답게 사진작품이 강세다. 러시아의 미술 전문잡지 ‘아트 크로니카’ 올 1월호에 발표된 당대 50명의 미술계 유력자에 포함된 미술가 중 대다수가 사진가다. 50대 작가 그룹 AES+F, 블리지슬라프 마므이셰프 몬로, 그리고 알렉 쿨릭(47), 아나톨리 아스몰롭스키(40), 드미트리 구토프(48) 등 60년대생 작가들이 모두 사진에 기반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은 아직 태동 단계다. 여전히 20세기 초 근대 작가와 사회주의 체제 시절 서구로 망명한 작가들이 러시아 미술의 대세다. 지난해 세계 미술시장 전문지 아트프라이스가 발표한 세계 500대 작가 중 200위권에 든 러시아 작가는 곤차로바(49위)·칸딘스키(56위)·소모프(61위) 등 11명으로 모두 근대 작가들이다.
동시대 미술에 먼저 눈뜬 이들은 석유와 금속을 팔아 번 돈으로 미술품을 구입하고 공유한다는 의식을 가진 젊은 부호들이다. 러시아 미술관에 가득한 명작들, 신흥 부자들의 경쟁적 미술품 수집이 바로 떠오르는 미술시장으로서 러시아 미술계의 단면이다. 작가의 출신 국가나 그 나라의 과거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현재 파워 컬렉터들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얼마나 활약하는지, 그래서 그 나라에 얼마나 쟁쟁한 미술품들이 축적돼 가는지도 중요하다.
서진수(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미술시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