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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회식자리로 프랑스요리점을 정했다.여직원이 바랐기 때문이다.
남자 직원은 불고기집에서 동동주판을 벌이고 싶어했으나 구실장은 프랑스요리 쪽을 택했다.불고기 파티야 나중에 우리끼리 얼마든지 가질 수 있지만 프랑스요리의 풀 코스는 좀처럼 마주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본셈은 딴데 있는 것같았다.고교수가 끼는 회식자리를 동동주 술판의 친압(親狎)한 분위기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이따금 을희에게 거는 고교수의 농담을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언짢아했다.술김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을희에게 다가드는 것을경계하는 모양이다.
산뜻하고 밝은 꾸밈새의 레스토랑이었다.몇쌍의 손님이 식사하고있는 사이를 누벼 지정된 방으로 들어섰다.
고교수는 먼저 와 있었다.
『하필 프랑스요리점입니까.막걸리집에서 순두부찌개나 돼지고기 김치 두루치기로 기세 올리는 것이 더 신날텐데요.』 『글쎄 말입니다.미스 박이 프랑스요리를 고집했거든요.우리 회사는 여성 제일주의 아닙니까.』 남자 직원이 웃으며 고교수 말에 화답했다. 말은 걸찍했지만 고교수는 은근히 멋부린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가늘고 자잘한 체크무늬 검정 바지에 노란 베스트.진한 회색벨벳 재킷을 걸치고 와인빛 포켓치프까지 꽂았다.
레스토랑 창 너머 저물녘의 한가을 마당이 보였다.붉은 단풍과검푸른 소나무 사이에 늘씬한 은행나무의 노란 빛이 순금처럼 눈부셨다.유리창의 가을 앞에서 고교수는 그 풍경의 한부분처럼 자연스러웠다.
식탁에 둘러앉자 웨이터가 와인 리스트를 가져왔다.
『어디 좀 볼까요?』 고교수는 포도주 이름이 깨알같이 적힌 리스트를 자청하여 받아들고 흰 포도주와 붉은 포도주를 각각 골라 주문했다.
『고장에 따라 포도 잘 익은 해가 따로 있습니다.그 해 포도주라야 맛이 있지요.오래됐다고,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 『포도주에 대해선 정말 모르겠어요.워낙 가짓수도 많고 이름도 길고 어려워 욀 수가 없으니….』 을희의 푸념을 고교수가 가로막았다.
『여왕은 그런 것 몰라도 됩니다.가신(家臣)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요.』 고교수가 흘긋 구실장을 건너다 봤다.그는 떫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포도주로 건배하고 달팽이요리 전채(前菜) 접시가 날라진 가운데 두번째 책 출판에 대한 의논이 나왔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얘기는 어떨까요? 역시 수수께끼에싸인 여왕입니다.』 구실장이 운을 뗐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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