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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사태·기업 파산 땐 금융위기 ‘제2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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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호 28면

미국 하원이 구제금융안을 부결한 지난달 30일 뉴욕 금융시장에선 은행 간 하루짜리 초단기 대출(오버나이트) 금리가 연 8%로 치솟았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기준금리(2%)의 네 배였다. ‘글로벌 자금시장에 대한 미 하원의 테러’에 경악한 금융회사들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후 들어 금리는 0.5%로 수직 낙하했다. 곳간을 다 채운 회사들이 돈을 내놓기 시작하자 갑자기 시장에 돈이 넘쳤다. 세계 금융의 심장인 월가의 불안심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같은 상황은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안이 발효됨에 따라 다소 진정될 전망이다. 정부가 시장의 보증인 역할을 자처한 이상 ‘누구를 불문하고 돈을 빌려주지 않는’ 극심한 신용경색은 상당 부분 해소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회사의 연쇄 부도 가능성도 상당히 낮아졌다.

美 구제금융 이후에도 남은 뇌관은

그러나 7000억 달러 투입을 곧 금융위기의 마감으로 보는 낙관론은 여전히 희박하다. 금융 부실의 규모가 적게는 1조 달러, 많게는 3조 달러로 추정되는 탓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부동산 값 하락에 따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몫이지만 회사채와 신용카드채, 자동차 할부금융 등 아직 드러나지 않은 폭탄들도 적지 않다. 이미 하락세로 돌아선 세계 경제의 침체는 이들 폭탄을 터뜨리는 뇌관 역할을 할 수 있다.

카드·할부채=제2의 서브프라임?
‘집값 폭락→모기지 파생상품 부실화→금융위기’의 순환고리는 또 다른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위기→실물경제 악화→신용카드·자동차 할부 부실화→금융위기 가중’이라는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는 서브프라임보다 훨씬 위험하다. 금리만 따져 봐도 서브프라임이 연 8% 정도인 데 비해 신용카드는 보통 20%, 할부금융도 비슷한 수준이다. 채무 불이행 위험이 훨씬 크다. 지난해 카드 대출로 모기지를 상환하는 ‘악성 돌려 막기’도 성행했다. 실제 미국의 카드 연체율은 지난해 하반기 6∼7%대에서 올 3분기 두 자릿수로 급등했다.

이 때문에 미국 금융회사인 이노베스트스트래티직은 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1조 달러에 달하는 신용카드 시장에서 늘고 있는 연체가 내년 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카드회사들이 올해 손실 처리한 규모가 400억 달러였는데, 내년에는 900억~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이다. 자동차 할부채권도 비슷한 규모로 부실화하고 있다. 이들 채권의 부실 규모는 모기지 채권만큼 크지 않지만 이미 허약해진 금융회사에 치명상을 입히기엔 충분한 수준이다.

게다가 이들 채권도 모기지처럼 상당 부분이 ‘파생상품’으로 변형돼 있다. 신용카드 빚과 자동차 할부가 채무자의 신용도에 따라 프라임과 서브프라임(비우량)으로 분류되는 것도 똑같다. 여러모로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하기 딱 좋은 여건이다.

신용카드와 할부금융 ABS는 지난해 3월 이후 급증했다. 서브프라임 부실이 표면화하면서 줄어든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주택 후순위 대출 ABS의 자리를 이들이 메운 것이다. 신용카드와 할부금융 회사들이 받을 돈을 바탕으로 발행한 자산담보부증권(ABS)은 지난달 19일 현재 미국 전체 ABS 중 48%를 차지한다. 지난해까지 전체의 20%대였던 비중이 2배 정도로 커졌다.

급증하는 회사채 부도율
미국 일반 기업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뉴욕대 에드 알트먼(경영학) 교수는 “경기 둔화에 따른 실적 악화로 2009년 일반 기업들의 디폴트율이 올해보다 2배 이상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 7월 말까지 일반 기업 디폴트율은 2.37%다. 지난해 9월 이후 1년 넘게 진행된 신용경색에도 불구하고 평년 수준의 디폴트율이다. 전문가들은 미 기업들이 호황 시절 빚을 대거 줄여 재무구조를 건전하게 바꿔놓은 덕분으로 이제껏 잘 버텨온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레버리지 비율이 높은 기업들은 안심할 수 없다. 2006년 말 현재 미국 기업 부채 총액 5조7000억 달러 중 약 3분의 1이 불량채무로 분류된다. 이와 관련된 고수익 채권 발행 잔액은 1조1000억 달러, 인수 금융으로 제공된 신디게이트 대출과 대출담보부증권(CLO)의 총액도 그 정도 규모다.

알트먼은 “미 경제가 조만간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며 “침체가 본격화하면 일반 기업의 디폴트가 가파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GM이 디폴트를 선언할 확률이 50%에 달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일반 기업의 디폴트 가능성은 유럽 쪽이 더 높다. 미국 기업과는 달리 유동성 거품 시절 빚내 자사주를 대거 매입하는 바람에 부채비율이 아주 높은 상태다.

떨고 있는 사모·헤지펀드
유동성 거품을 만끽하며 금융시장의 새 주역으로 각광받은 사모펀드도 디폴트 후보에 들어 있다. 사모펀드는 돈을 빌려 회사를 사냥한 뒤 되팔면서 투자은행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였다. 원금과 이자를 대는 쪽은 포획된 기업들이다. 사모펀드 서버러스 캐피털은 지난해 74억 달러를 들여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를 사들였는데, 이때 매입자금 중 절반 이상이 빚으로 알려져 있다. 나날이 실적이 악화하고 있는 크라이슬러가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 서버러스가 조달한 빚을 어떻게 감당할지 의문이다.

헤지펀드는 신용경색의 와중에서 가장 약한 고리로 간주된다. 지난해 말 현재 전체 헤지펀드의 3분의 1인 7500억 달러 규모가 신용보증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들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부도 위험이 가장 큰 채권과 파생상품에 대량으로 투자해왔다는 점이다. 자기자본과 부채의 비율인 레버리지도 1대5에서 최고 1대10에 이른다.

상업용 모기지·모노라인
사무용 건물과 콘도·공장 등의 상업용 모기지를 담보로 발행하는 증권인 CMBS도 또 다른 뇌관이다. 2005년부터 급속히 성장하다 지난해 3분기부터 눈에 띄게 정체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8000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부도 위험도를 반영하는 스프레드는 지난해 가을부터 급속히 확대됐고 대규모 시가(時價) 평가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대형 은행들의 창고에는 시장에서 외면당한 채 시가 평가의 충격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는 미판매 CMBS가 가득 쌓여 있다고 한다.

올해 초 한 차례 위기를 겪은 모노라인 보험사 또한 신용시장의 숨겨진 골칫거리다. 전통적으로 지방정부 채권에 투자한 사람들의 원금 손실을 보전해주는 보험 기능을 담당해오던 이들은 최근 모기지 등 다른 영역으로 사업범위를 넓혔다. 문제는 이들의 자기자본이 보증액의 100분의 1도 안 된다는 점이다. 보증했던 서브프라임 관련 채권의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도 위기를 겪었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지방정부의 디폴트 위험이 커지고 있는 것은 모노라인 회사들에 심각한 위협 요인이다.

최악의 뇌관 ‘펀드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런 불안 요인들이 한꺼번에 금융시장을 엄습하는 경우다. 기업의 실적 전망과 신용등급의 하락, 회사채 발행금리의 급등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면 주식형과 채권형을 불문하고 펀드에 투자한 돈을 환매하려는 펀드런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조짐은 이미 몇 차례 나타났다. 지난해 유럽에서 BNP파리바의 펀드가 투자자들의 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했고, 최근 미국 머니마켓펀드(MMF)가 손실을 입으면서 미 재무부가 긴급 보증에 나서기도 했다. 인도와 중국에선 지방은행들의 예금 인출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세계 우량기업의 대명사인 GE의 신용 전망조차 위협을 받는 상태에선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미국과 세계 각국의 전례 없는 대응도 이런 상황만은 꼭 막아야겠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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