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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오만과 불안한 고독의 이중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호 03면

“똥. 덩. 어. 리”라는 단어를 이토록 설득력 있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배우 김명민(36) 말고 또 있을까.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동시간대 드라마들을 제치며 화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건 의심할 바 없이 극중 괴짜 마에스트로를 연기하는 김명민의 힘이다.

음악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

중저음의 나른한 음성에 실린 날카로운 독설, 입 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웃는 ‘썩소’는 ‘바르고 고운 말만 할 것 같은’ 배우 김명민의 이미지를 가차 없이 뒤집는 것이기에 더욱 재미있었다. ‘의외의 조합’을 ‘환상의 조합’으로 바꾸어 낸 배우 한 사람의 힘은 대단했다. 8회가 방영된 지금, 초반만 해도 영 겉돌던 주변 캐릭터들까지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고, 어설퍼 보이던 설정은 단단한 내러티브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김명민이 연기하는 지휘자 강건우, 일명 ‘강마에’는 입만 열면 누군가를 깔보고 비웃는, 어찌 보면 ‘단순 코믹 악역’ 캐릭터다. 하지만 까칠하고 오만한 모습 뒤편에서는 기댈 곳 없는 어린아이의 불안함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김명민이 연기해 왔던 배역이 다들 그랬다.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강자인지 약자인지 그 정체를 판단해 내기가 쉽지 않은 인물들. ‘하얀거탑’의 외과의사 장준혁은 성공을 위해 주변인들을 파멸로 이끄는 짓도 서슴지 않았지만, 자칫 발을 헛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녹초가 된 서글픈 존재였다.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김명민이 연기한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 면모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던 외로운 남자의 냄새가 강했다.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이 같은 이중성이 훌륭한 극본 덕분인지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힘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꽃보다 아름다워’의 고뇌하는 재벌 2세나, ‘불량가족’의 우울한 조폭 역할까지 생각해 낸다면 김명민이라는 배우가 갖고 있는 어떤 아우라 때문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김명민은 1996년 SBS 공채 출신으로 연기에 입문했지만 눈에 띄는 역할을 맡지 못한 채 긴 무명 생활을 거쳤고, 2001년 영화 ‘소름’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뒤에도 몇몇 영화가 엎어지는 등 불운이 뒤따랐다. 고민 끝에 “배우 그만두고 뉴질랜드로 이민 가자”고 결심한 순간 극적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불멸의 이순신’에 캐스팅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 이순신 역할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듯싶었지만 그 뒤로도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홈런’이었지만 영화 ‘리턴’ ‘무방비 도시’ 등은 딱히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를 냈다. 알고 보면 그의 필모그래피도 극중 캐릭터처럼 불안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캐릭터를 찾아냈고, 자신에게 딱 맞는 캐릭터를 만났을 땐 제대로 광채를 낼 줄 아는 배우였다.

그는 말한다. “늘 노력해서 무언가를 보여 주는 삶이었다. 정말 잘 안 된 작품들도 많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때도 있었기에 나는 늘 절박하다”라고. 의사 역할을 위해 5개월간을 병원에서 살았고, 강마에로의 변신을 위해서는 악기 20여 종의 특징과 음색을 모두 익혔다. 연기에 몰입하는 걸 방해할까 봐 촬영장에 ‘밥차’가 오는 일에도 가끔 짜증을 낼 만큼 현장에선 늘 긴장한다. 이런 치열함을 알기에 “꿈을 이루라는 게 아냐. 꾸기라도 해보라는 거야!”라고 외치는 강마에의 낯간지러운 대사가 유난히 가슴을 후벼 파는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성패와 상관없이 연기자 김명민에게 ‘절대 신뢰’라는 품질보증서를 붙여 주고 싶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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