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충격의 죽음 … 곡절 얼룩진 짧은 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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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최진실씨를 처음 스타덤에 올린 것은 깜찍한 주부 이미지의 CF였다. 1989년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카피의 가전제품 CF에 출연한 최씨.

◆90년대를 풍미한 원조 ‘국민 요정’=최진실씨의 스타 탄생은 극적이었다. 데뷔작 ‘조선왕조오백년-한중록’에서 그의 배역은 대비가 방으로 들어갈 때 문 열어주는 궁녀.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단역이었다. 그러던 무명의 여배우가 기회를 만난 건 김희애씨를 모델로 한 화장품 CF에 출연했을 때. CF를 보던 한 전자제품 회사 간부가 “저기 김희애씨 뒤에서 미소 짓는 저 아가씨 잡아 와!”라고 외쳤고, 이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유명한 카피의 광고 출연으로 이어졌다(95년 발간된 자전소설 『신데렐라는 없다』).

90년대는 최진실씨의 시대였다. ‘질투’ ‘폭풍의 계절’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등의 드라마,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미스터 맘마’ ‘편지’ 등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통통 튀면서도 귀여운 이미지는 이전까지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신비주의 전략으로 일관하던 톱스타들과 달리 그는 친근하고 상큼한 신세대 스타 이미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광범위한 팬층을 확보했다. 주철환 OBS 대표는 “지금의 30, 40대에게 최진실씨는 단연 ‘국민 요정’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최진실씨는 MBC ‘질투’(1992), ‘별은 내 가슴에’(1997) 등 트렌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국민요정 자리에 올랐다. 2000년 야구스타 조성민씨와의 결혼은 행복의 정점이었다.

최진실씨는 여러 면에서 ‘1호’의 의미를 갖는 기념비적 스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CF로도 스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요즘처럼 연기자가 매니저를 두는 일이 흔치 않던 90년대 초반 그는 배병수씨라는 걸출한 매니저와 결합함으로써 전문 매니지먼트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화려한 겉모습, 굴곡진 삶=이처럼 화려한 최진실씨의 외양과 달리 성장 과정과 결혼 이후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최씨의 별명은 ‘최수제비’. 어렸을 적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수제비를 하도 많이 끓여 먹었다는 데서 온 별칭이다. 수제비에 물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습관도 유명하다. 끼니 굶지 않는 것이 지상 과제였을 만큼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그에게는 연예계 입문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방편이었다. 억대 출연료를 받았어도 한때 촬영장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닐 정도로 ‘짠순이’였던 그는 저축의 날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혼 후 슬럼프에 빠졌던 최진실씨는 2005년 KBS ‘장밋빛 인생’의 억척녀 역할로 재기에 성공했다. 올 초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사진)로는 줌마렐라 신드롬도 불러일으켰다.

결혼과 이혼은 최진실씨에게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다. 학창 시절 ‘진실이 누나’의 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여 놓았던 조성민씨와의 결합은 대중에게 한 편의 달콤한 로맨스를 선사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국민적 관심사였던 만큼 이혼 과정에서도 사생활이 거의 가감 없이 생중계되며 치부가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스타로서의 상품 가치도 당연히 추락했다. 하지만 2005년 남편한테 배신당하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억척녀 맹순 역을 맡은 ‘장밋빛 인생’(KBS)에서 최진실씨는 온몸을 던진 억척 연기로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올 초에는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MBC)의 서른아홉 살 이혼녀 역으로 ‘줌마렐라(아줌마+신데렐라)’라는 말을 다시 유행시켰다. ‘내 생애…’는 내년 1월 방영을 목표로 최진실·정준호씨 주연의 시즌2가 기획 중이었다. 그는 죽기 며칠 전 지인과의 전화통화에서 “연말 방송국 연기대상에서 나와 정준호씨가 ‘내 생애…’로 베스트 커플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을 정도로 자신에게 ‘회춘’을 선사한 이 작품에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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