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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낙인 가족들 처형.수용소 생활-脫北 동용섭씨 家系.삶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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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용섭(董龍燮.52)씨는 북한에서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을 이어 나갔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철도대학을 나온 인텔리 출신의 부친 董창모씨가 사망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51년 6월께.董창모씨는 국군이 함경남도북청군에 진주할 때 이곡면(面)자치회장이었다. 그는 흥남철수 작전때 국군을 도와 월남을 희망하던 주민및 국군.유엔군등 약 5백70명을 탈출하게 했으나 정작 본인은 혼란의 와중에 북한에 남게 됐다.
6개월간을 숨어 지내던 董씨는 결국 내무서원들에게 적발돼 북청군 영달산 밑에서 「총알이 아까워 돌탄으로 죽이는」 공개처형을 당했다.당시 나이는 34세였다.
이후 동용섭씨등 남겨진 7명의 자녀를 먹여 살리는 책임은 부인 李계순(93년 사망)씨의 몫이 됐다.
부농의 딸이면서 삼촌이 항일투사였던 李씨는 산밑 돌막으로 쫓겨갔다. 이 와중에 동용섭씨의 누이 2명이 숨졌다.董씨가 성장하자 북한 당국은 모친 李씨와 董씨를 갈라 놓았다.
董씨는 63년부터 66년까지 북한에서 유일한 원예대학인 북청군의 원예 단과대학을 다니며 과수원 기술을 익혔으나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위를 받지 못했다.
董씨의 불행은 계속됐다.둘째 자형인 金종산씨가 61년에,첫째자형인 강병학씨가 62년에 각각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셋째 누이의 시아버지가 총살을 당했다.
둘째 자형인 金씨는 체포된 뒤 10년후께 사망했는데 金씨의 형이 한국에서 고위 공무원인 金종설씨이며,첫째 자형 강병학씨의동생은 시인이었던 강병순씨로 그 역시 58년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董씨는 67년부터 과수원 기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용양광산에 노동자로 배치돼 70년 광산사고로 발목이 다치는 불운등을 겪으며 90년까지 23년여간을 광부와 용양광산 사진사로 번갈아 일했다.
90년부터는 북청군의 교육도서및 기자재 공급소 공급원으로 근무해오다 지난 2월 동료들과 술을 먹으며 김정일(金正日)의 흉을 본게 동료들에 의해 밀고되자 탈출을 결심,3월5일 중국으로넘어왔다.
이후 약 5개월을 중국에서 떠돌다 이달초 홍콩으로 탈출,망명을 신청했다.
홍콩=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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