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黨바뀌어야한다>2.政策정당으로 거듭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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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회 의원회관 8층에는 여야 각당의 전문위원실이 있다.의원들의 입법활동을 도와주고 각당의 정책을 만들어내는 두뇌집단이다.
제1야당인 국민회의의 경우 박사.석사들로 구성된 전문위원이 9명,정책연구위원을 포함해 총 16명이다.제1야당의 정책을 만들어내는 주역들이다.정기국회가 목전에 다가오면 이들은 자주 밤샘작업을 한다.『그렇게 연구를 열심히 하느냐』고 깜짝 놀라지만실상은 그런게 아니다.
『전문위원실에 컴퓨터가 3대뿐이어서 남들이 쓰고난 뒤에 작업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국민회의 전문위원 A씨의 말이다. 요즘은 웬만한 고교에도 수십대씩 있는게 컴퓨터다.그 흔한 컴퓨터가 제1야당의 정책입안팀엔 5명당 1대꼴도 안되는 실정이다. 자민련은 전문위원 1명이 국회 상임위를 2개 이상씩 담당한다.전문위원수가 부족해서다.1개 상임위에는 산하기관만 해도 10여개를 넘고 산하기관들이 집행하는 정책은 수백,수천개도 더된다.그런 상임위를 한사람이 2개이상 맡아 관련정책 을 뽑아내라고 요구한다.애초에 불가능한 주문이다.
여당도 나을게 없다.신한국당 정책관계자는 『정당의 정책실을 아예 폐지하고 대학 연구소에 용역을 주자』는 제안을 했다.『여당의 정책산출 기능도 3류대학 연구소에 맡기는 것보다 못하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다음은 여야 각당이 올1~4월까지 정책분야에 투자한 금액이다. 신한국당은 이 기간에 총 7백73억원을 썼는데 이중 정책분야에 16억4천만원,전체의 2.1%만 투자했다.국민회의는 1백24억원중 2.5%인 3억1천만원,자민련은 1백15억원중 1.
9%인 2억1천만원을 투자했다.평균잡아 2%씩 투자 한 셈이다. 『억단위가 되니까 많이 쓴 것 같지만 토론회나 공청회 한번열어도 수백만원씩 듭니다.게다가 사용한 돈의 대부분이 정책에 관한 홍보책자를 만든 비용이니까 엄밀히 말해 홍보비죠.』 국민회의 조영석(曺永錫)정책조정실장의 하소연이다.정책정당이 되겠다면서 정작 정책부문에 불과 2% 남짓의 예산만 쓰고,그나마 정책개발이 아닌 홍보분야에 집중시키고 있다.이 지경이니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리 만무하다.전문위원들의 자질 문제도 심각하다.
여야를 통틀어 전문위원은 39명.이들중 인터네트를 제대로 사용할줄 안다고 답한 사람은 1명뿐이었다.
국민회의는 지난해 대학강단에 있던 젊은 엘리트들을 대거 충원했다.그러나 6개월만에 이들중 상당수가 대학으로 되돌아가 버렸다.『정당이 이런 식으로 정책을 만들어내는줄 정말 몰랐다』는게이들의 귀거래사(歸去來辭)다.
자민련의 경우 전문위원 13명중 1명만 빼고 전부 경력이 1년도 안된다.신한국당은 갈 자리가 마땅치 않은 당료출신들을 전문위원이나 정책위원으로 대거 보내고 있다.물론 정책에 전문가가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당정협의회」란걸 한다.당과 정부가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는데 협조한다는 취지다.
『정부가 안을 갖고 오면 그걸 당에서 이름만 포장해 내놓는게거의 전부죠.정부의 협조없이 당이 독자적으로 정책을 입안한다는건 불가능합니다.』신한국당의 또다른 정책관계자 B씨의 실토에서당정협의회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여당이 이 정도면 야당의 정책기능은 볼 것도 없다.
『우선 정보 자체가 입수되지 않아요.정부의 어떤 부처도 야당의원들이 달라는 자료는 제때에 안줍니다.그래서 주로 전년에 국정감사에서 나온 자료와 신문기사를 참고해 정책을 만듭니다.그게오죽하겠습니까.』자민련 허남훈(許南薰)정책위의장의 말이다.
투자 안하고,인적자원도 변변치 않고,홍보가 되지 않는 정책은거들떠 보지도 않는 우리네 정당풍토.여기서 생산되는 정책이란 주먹구구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하원의원 1명이 평균 24명의 정책보좌진을 거느리고 정책을 입안한다.우리네 여야 전체의 정책위원을 다 합쳐봐야 미국 하원의원 3명의 정책보좌관들보다 적은 셈이다.
그래서 나온 정책을 한번 살펴보자.지난해 정부.여당은 저소득층의 세(稅)부담을 완화해준다는 취지로 소득세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한데 정작 실시하려고 보니 개정안이 오히려 고소득층에만 이익을 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전문가들과 언론이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부랴부랴 재개정안을 마련해 올 6월 임시국회때 슬그머니 통과시켰다.『과세표준을 적용할때 소득재분배가 어떻게 변할지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입니다.근로자의 표만 의식해 부랴부랴 만들어내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사태가 빚어진 겁니다.』(국회전문위원 K씨) 국회 전문위원들은 『다른 정책들도 다 대동소이하다』고 입을 모은다.
처음부터 실현가능성을 꼼꼼히 따져보고 그로 인해 일어날 부작용이나 마찰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설령 정책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나오면 쑥 들어가 버리고 만다.이런 분위기가 수십년동안 계속돼 왔다.그래서 여야 각 정당은 물론 의원들 스스로도 『정책이나 공약은 선거용』이라는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말뿐인 정책정당」의 현실은 유권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국민회의의 전임 정책위의장 손세일(孫世一)의원은 『유권자가 정책을보고 찍지 않는데 어느 정당이 정책개발에 신경을 쓰겠느냐』고 말한다. 국민대 조중빈(趙重斌.정치학)교수는 『정당이 국고보조금을 받는 이상 일정액 이상을 정책개발비에 할당하도록 강제하는등 획기적인 방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독일의 경우 그게법으로 정해져 있다.
여야 정당은 정책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정책없는 정당이란 결국 사당(私黨)이거나 붕당(朋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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