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평소 무관심에 '노메달' 비난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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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호방한 성격이어서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잠든 한밤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들은 성실하고 공부도 웬만큼 했지만 시험을 앞두고는 늘 마음이 불안했다.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듯하던 아버지가 성적표만 받아오면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며 호통을 치곤 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당초 목표로 삼았던 금메달 12개는 커녕 목표를 수정해 잡았던 10개도 채우지도 못하게 되자 신문사에는 『선수들의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배가 불렀는지 정신력이 해이하다』『1년내내 운동만 했다는 선수들의 성적이 너무 한심하다』는 독자들의 전화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쇄도한다.
물론 야구.남자농구등 소위 국내에서 인기종목으로 대접받고 있는 일부 선수들의 흐트러진 자세나 무성의한 플레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그러나 이들의 분노에 찬 전화를 받으며 기자는 『과연평소 얼마나 이들 종목에 관심을 갖고 계셨느냐』 고 되묻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철저한 무관심과 비인기종목의 설움속에 한창 나이에 선수촌에 「감금」된 채 묵묵히 땀과 눈물을 쏟아온 선수들에 대한 비난은오히려 염치없게까지 느껴진다.
누가 과연 이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밤을 지새워 하키와 양궁.배드민턴.핸드볼을 관전하며 열을 올리는 정성은 가상하다지만제대로 경기규칙을 알고 보는 시청자가 몇이나 될까.
어느 여자하키선수는 일기장에 『싸늘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은 우리들의 피부에서 윤기를 걷어갔다.그러나 바람이나 햇볕보다 더견디기 어려운 것은 볼을 때리는 소리만 울려퍼지는 경기장에서 느껴야 하는 고독감』이라고 써놓았다.
아들의 공부방을 비추는 전구의 불빛보다 캄캄한 술집의 조명에익숙한 아버지처럼 우리도 지금 성적표만 놓고 역정을 내고 있는게 아닐까.
허진석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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