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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불가항력적 고통의 터널, 참고 통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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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세계 금융시장을 주름잡던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가 하루 사이에 증발됐다. 간신히 ‘9월 위기설’을 넘긴 한국에 태평양을 건너 초대형 쓰나미가 덮쳤다. 진앙지인 뉴욕보다 서울 금융시장이 더 쑥대밭이 됐다. 코스피·코스닥 지수는 연중 최저치로 내려앉았고, 원-달러 환율은 1160원대로 치솟았다. 그러나 과민 반응은 금물이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예정된 수순이고, 메릴린치는 당초 예상보다 서둘러 정리됐을 뿐이다. 금융시장을 괴롭히던 뇌관들이 하나씩 제거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살펴봐야 한다.

문제는 미국 금융위기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세계시장에는 1000조 달러의 파생금융상품이 떠돌고 있다. 미국의 주택담보대출만도 10조 달러에 이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인한 금융 손실은 지난해 7월 5000억 달러에서, 지금은 1조5000억 달러가 넘는다는 추산이다. 아무리 미국 정부라도 수조 달러의 금융 손실을 수천억 달러 수준의 공적자금으로 모두 틀어막을 수 없다. 이번 금융위기의 깊이와 바닥을 점치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확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융 불안이 실물경제에 전염되는 것도 걱정스럽다. 지금 미국 내수시장은 정부의 세금 환급으로 버티는 빈사 상태다. 뉴욕 증시도 다국적 기업들이 해외시장에서 올리는 수익에 목을 매는 형국이다. 뉴욕발 금융위기가 아시아·유럽시장을 휩쓸 경우 미국 경제는 또 한 단계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미국 경제는 일본과 독일·중국을 합친 것에 버금가는 규모다. 만약 미국 경제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다면 미국 자본주의,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

미국 금융위기가 해결의 가닥을 잡으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침체를 거듭하는 주택시장이 바닥을 치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의 고점 대비 18% 떨어진 미국 주택가격은 앞으로도 7~8% 더 하락할 것이라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위기 해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국제 공조다. 미 재무부는 금융시스템을 직접 위협하는 경우에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되 일반 금융회사의 부실은 시장원리에 맡기기로 선을 그었다. 미국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다행히 국제적인 공조는 순조로운 편이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은 돈을 넉넉히 풀기 시작했고, 중국 인민은행도 4년 만에 금리를 내리는 비상대책에 나섰다.

앞으로 미 금융기관들의 우량 자산마저 부실화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주택 대출에 이어 신용카드나 자동차 할부금융 부실까지 불거질 수 있다. 부실 금융회사들이 기댈 언덕은 사라졌다. 획기적인 자구책을 통해 스스로 일어서든지, 아니면 헐값 매각이나 파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공포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세계 최대 생명보험회사인 AIG나 미 최대 저축은행인 워싱턴 뮤추얼(WaMu)이 무너진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부동산 금융상품을 집중 투기해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지목돼 온 회사들이다.

걱정스러운 대목은 서울의 시장이 훨씬 심한 몸살을 앓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체질은 취약하다. 복잡하게 뒤엉킨 국제금융의 메커니즘과 투자심리를 감안하면 한국이라고 충격을 피해갈 뾰족한 수는 없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미국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내 금융기관의 건전성에는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가계 대출이나 부동산 대출의 규제를 상당히 강화해 왔기 때문에 우리 금융회사들이 치명상을 받을 위기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서울 시장이 심한 후폭풍을 겪은 이유는 신뢰의 상실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번 미국 금융위기는 예고된 것이다. 앞으로도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여진이 밀어닥칠 게 분명하다. 한국으로선 불가항력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예고된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지금은 정부가 중심을 잡고 각 경제 주체들이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온 국민들에게 전 세계적 위기를 참고 견뎌내자고 호소할 필요도 있다. 그래야 앞으로 지나가야 할 고통스러운 터널을, ‘제2의 IMF’ 위기를 피하면서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