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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情과 인연이 날 춤추게 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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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호 04면

송해씨가 파란 사인펜으로 표시한 ‘전국노래자랑’ 방송 대본. 원고지에 손글씨를 고집한다. 추석 특집에 출연하는 전국 이장과 통장에게 대사와 태도 등을 지도하는 리허설 시간. 7일 오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전국 이장·통장 노래자랑’ 녹화 현장.

“오빠~, 송해 오빠~~”
손을 내저으며 부르는 아줌마들의 애교 듬뿍한 호칭에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지난 일요일 서울 여의도 광장. ‘전국 이장·통장 노래자랑’ 녹화 현장은 구경꾼들로 북적댔다. 그 복판에 송해(81)씨가 있었다. 현철·설운도·태진아 등 트로트 가수들이 줄줄이 등장했지만 단연 인기 으뜸은 진행자 송해씨다. 햇빛에 타 까무잡잡한 얼굴에 흰색 면 티를 걸친 털털한 그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오빠’를 연호하는 여성팬들이 몰려들었다. 옆에 있던 한 출연자가 “송해 선생 인기는 식을 줄을 몰라.” 한마디 거든다.

‘81세 현역’ 송해의 경쟁력

이날 무대는 15일 낮에 방송될 추석 특집 프로그램으로 평상시 ‘전국노래자랑’보다 배쯤 되는 분량을 찍어야 했다. 오후 1시에 시작하는 녹화를 위해 송해씨가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 오후 4시30분 일이 끝날 때까지 점심을 챙기던 30분쯤을 빼곤 줄곧 서서 젊은 스태프들과 함께 움직였다. 무대 위에서도 계속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거나 방청석을 향해 흥과 박수를 유도하는 몸짓을 하는 송해씨는 얼핏 혈기왕성한 40대 장년층으로 보였다. ‘전국노래자랑’ 구성을 맡고 있는 정한욱씨는 “지역에서 녹화할 때는 하루 전에 내려가셔서 그 마을 구석구석을 살피고 사람들 만나며 방송 준비를 하는 꼼꼼한 분”이라고 귀띔했다.
 
‘전국노래자랑’ 30년의 산 역사
전국 10만 명 이장과 통장 중에서 뽑혀온 27명 출연자들을 통솔하는 송해씨의 말솜씨는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리허설을 하며 긴장을 풀어주느라 쏟아내는 얘기 하나하나가 그대로 대본이다. “여러분이 제 고장 자랑 양껏 다 하려면 내일까지 밤새 찍어도 못해요. 그저 식사 든든히 하시고 무대 나오면 천하가 내 거다 생각하시고 신나게 해주세요. 아셨죠?”

잠시 천막 그늘에서 분장을 받는 동안에도 그를 찾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초대 가수로 온 김상희·주현미·장윤정 등이 허리 굽혀 절을 하니 일일이 안부를 묻는다. 옆에 섰던 박태환 PD는 그런 송해씨가 ‘전국노래자랑’의 간판이자 산 역사라고 설명했다. “송해 선생과 함께 무대에 한 번 서고 나면 행복 엔도르핀이 펑펑 솟는다는 분이 많아요. 이 프로는 콩쿠르가 아니라 송해씨와 어울려 한판 노는 동네잔치라 할 수 있죠. 시청자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건전 오락 프로이고, 그 즐거움을 끌어내고 지속시키는 분이 송해씨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녹화가 시작되자 송해씨 목소리가 여의도 바닥을 쥐락펴락한다. 오산에서 온 여자 통장이 입에 넣어주는 송편을 맛있게 먹으며 “누나가 주는 송편은 처음”이라고 너스레를 떠는가 하면, 첫 소절도 다 못 부르고 ‘땡’ 탈락한 도암리 이장에게는 “너무 긴장하셨나봐.” 손을 잡아주며 악단에게 한 번 더 반주를 부탁한다. 그는 3시간30분짜리 전국노래자랑 음악회를 통솔하는 지휘자였다.

한 출연자가 입고 나온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뒤 메달을 머리에 건 송해씨. 무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더 많이 망가지려고 노력한다. 신인섭 기자

통일되면 북쪽 전역 돌고 싶어
이틀 뒤 오전, 종로구 낙원동에 자리한 ‘한국원로연예인 상록회(常綠會)’ 사무실에서 송해씨와 마주앉았다. 녹화가 있는 날은 프로에 집중하기 위해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그의 일리 있는 부탁 덕에 느긋하게 그의 말씀을 듣게 됐다.

-그 연세에 ‘오빠’라 불리는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걸어 다니는 거죠. 저는 매니저도 없고 운전기사도 없어요. 도곡동에서 종로3가까지 지하철로 다닙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없는 날에는 아침에 한 시간씩 집 뒤 양재천 나무 길을 걷습니다. 또 하나, 가족처럼 호흡하며 생활을 같이하는 ‘전국노래자랑’ 팀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들이죠. 우리 프로를 아껴주시는 전 국민이 제 건강의 후원자랄까요.”

-내년에 전국노래자랑이 30주년을 맞게 되는데 그 긴 세월을 지탱해준 힘이 무엇일까요.
“서로가 하나 되는 마음 아닐까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요새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우리 프로만큼 참가자·진행자·시청자가 하나 되는 무대가 또 있을까 싶어요. 빈부 격차, 지역 갈등, 세대 단절을 다 뛰어넘은 게 전국노래자랑입니다. 한 번은 시각장애인이 신청을 했어요. 장충체육관에서 설 특집을 할 때였는데 찬반양론이 엇갈리다 그분을 모셨어요. 무대가 높아서 따님이 그 어른을 모시고 나왔는데 객석이 숨소리 하나 안 나고 조용한 거예요.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시던지 박수가 3분 넘게 계속됐어요. 게다가 앙코르까지 외치니 생방송을 진행하는 제가 얼마나 진땀이 났겠어요. 하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짜릿해요. 13세 때 시력을 잃었다기에 답답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다 노래로 푼다고 해요. 고향 노래를 부르면 고향 풍경이 떠오르고 어머니 노래 하면 엄마 얼굴이 보인다는 말씀에 뭉클했죠. 그 뒤로 장애인 출연이 갑자기 늘었고요. 노래란 이렇게 위대한 겁니다. 우리 사회 그늘에서 제 대접을 못 받던 분들이 여기 나와 그 응어리를 노래로 풀고 가실 때 보람을 느끼죠.”

-전국노래자랑 프로가 이렇게 오래가리라고 예상하셨나요.
“맨 처음에는 군 단위에서 시작했어요. 한 3년이면 전국 돌고 마무리하겠구나 싶었죠. 그러다 시로 가니까 여기저기서 우리 고장에는 왜 안 오느냐고 섭섭해해요. 행정구역 조정이 되니까 또 갈 곳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북쪽 모란봉도 가게 되고 멀리 파라과이까지 날아가 교민들도 만나고요. 타향살이 하시는 분들이 전국노래자랑 보시면서 잊었던 말뜻도 익히고 풍속도 되살린다니 세계적인 프로라 할 수 있겠죠. 앞으로도 몇 십 년은 가지 않을까요. 통일되면 북쪽 지역도 다 돌아야 할 테니 말이에요.”

-원래 희극 배우로 무대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요즈음 여기 사무실에 나오는 심우섭 감독 작품을 많이 했죠. 희극을 하려면 정극을 알아야 해요. 비극도 알아야 하고.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기쁨을 알겠어요. 구봉서 선배가 한 영화에서 죽어가며 읊은 명대사가 있어요. ‘나 죽으면 누가 너희들 웃기니.’ 그런 페이소스가 있는 희극 배우가 요새는 드물어요. 바닥부터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할 텐데 다들 너무 급해요.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고, 번쩍 하면 스타가 되는 것으로 착각해요. 그 계산서가 나중에 다 온다는 걸 모르고 말이에요.“

-최근에 연예인 자살 사건이 간간이 일어나는데요.
“겉보기엔 화려하고 즐거워 보이지만 남들 앞에 선다는 게 참 외로운 일이죠. 고독을 씹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요. 그걸 넘어가려니까 힘든 거고요. 누군가 나더러 인생이 뭡니까, 물었을 때 내가 그랬어요. ‘인생이란 나도 모르게 흘러가는 거다.’ 그때는 좀 싱거운 답이다 싶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자꾸 되새기게 되는군요.”

-요즘 같은 명절 때면 더 바빠지는 분들이 연예인인데요.
“남들이 한가할 때 거꾸로 바쁜 게 우리 직업 특성이죠. 그래서 난 ‘집안에 점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빵점이죠. 안사람이 50년을 참고 살아 준 게 고맙죠. 마음이 있어도 가족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어요. 약속 어기기 쉽고, 인사 빠뜨리고, 그러다보니 고독하고. ‘상록회’에 모이는 동년배 연예인들하고 술 한잔 하며 이런저런 얘기 나누는 게 낙이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 무렵에 사무실에 남아있던 몇몇더러 ‘가자, 소주 한잔 하러’ 권하면 마음이 푸근해져요. 여기 낙원동이 음식 맛있고 값싸고 참 좋은 동네예요. 주머니 털어 1만원짜리 안주 하나 시키면 푸짐해요. 술은 꼭 소주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몇 잔 먹고 집에 돌아갈 때는 행복해요. 내 일평생 보약이 소주였던 거죠.”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을 다 편히 대하실 수 있는 능력이 놀랍습니다.
“그분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마음이면 만사형통이죠. 늘 고맙고요. 세상에서 누가 제일 부자냐 물으면 대부분 건강한 사람이라 하죠. 그럼 건강한 사람 중에 또 부자는 누구냐 하면 다들 머뭇거려요. 저는 사람을 많이 아는 게 부자다 하죠. 그게 바로 나거든요. 26년간 이 프로 하면서 담당 PD가 130명 넘게 바뀌었어요. 내가 그 많은 시어머니를 모신 사람이에요. 사람을 너무 많이 아니까 불편한 점도 있긴 해요. 택시를 타면 기사분들이 택시비를 안 받아. 그럼 어떡해요. 안 받겠다, 받아라 실랑이하다가 결국 제가 돈을 던지고 냅다 뛰어갑니다. 그러니 잔돈을 어떻게 받아요. 식당에 가서도 똑같아요. 밥값을 못 받겠다는 주인장에게 제가 이럽니다. 밥값을 안 받으시면 제가 밥벌이를 못합니다.”

-그 소중한 사람 재산으로 뭔가 다른 일을 하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나는 무대에서 시작해서 무대에서 죽을 사람입니다. 다른 길로 가면 100번 지게 돼 있어요. 무대인은 무대만 생각하며 살아야지 옆길 돌아보면 무대는 소홀해지기 마련이에요. 웃음 아낄 게 뭐 있어요. 죽는 그날까지 무대에서 사람들과 웃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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