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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소프라노 홍혜경 ‘슬픔에 젖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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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역사를 깨는 거죠.”

지난해 12월, 소프라노 홍혜경(49)씨는 들떠 있었다. 테너 김우경(31)씨와 함께 출연할 올 10월의 ‘라보엠’ 때문이었다.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한국인이 동시에 주연을 맡는 첫 기록이 될 공연이었다. “동양인으로서도 최초예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죠.” 홍씨의 주특기인 섬세하고 세련된 ‘미미’ 연기가 한국 후배와 함께 빛을 발할 참이었다. 그런데 홍씨가 이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그는 지난달 출연을 취소했다. 그리스 태생의 소프라노 알렉시아 불가리두(Alexia Voulgaridou)가 그 대신 ‘미미’를 노래한다. 로열 오페라는 이미 바뀐 캐스팅으로 티켓을 판매 중이다. 다음달 11, 14, 16일 열리는 공연에서 한국인의 이중창을 들을 수 없게 된 셈이다.

 홍씨는 음악계의 ‘사건’이던 이 공연을 왜 취소했을까. 이유는 남편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슬픔 때문이다. 재미 변호사이던 남편 한석종씨는 지난 7월 중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4세였다.

2007년 1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홍혜경(右)과 김우경(左)이 한국 성악가 최초로 함께 공연하는 장면. 올 10월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로 또 한번 예정됐던 동시 주연 장면을 결국 볼 수 없게 됐다. [중앙포토]

로열 오페라는 물론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에서 주연으로 무대를 누비던 홍씨는 당분간 휴식에 들어갔다. 최근 신시내티에서 공연된 ‘라 트라비아타’ 또한 홍씨 대신 다른 소프라노가 ‘비올레타’ 역을 맡았다.

홍씨의 가족사랑과 부부금실은 유별했다. 그는 1남2녀인 아이들과 남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오랫동안 멀리 떠나는 연주 여행은 될 수 있는 대로 줄여왔다. 지난해 12월 연주는 4년 만의 내한 독창회였다. 가족이 모두 한국에 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계획이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남편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공연을 잡았다. 그런데 바로 이즈음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고 홍씨는 혼자서 한국에 들러야 했다. 그리고 7개월 만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상법 전문 변호사였던 한석종씨는 재미 제주도민회장, 뉴욕 한인변호사협회장을 역임하며 활발히 활동해 왔다. 한인 2세들의 장학 사업 등에도 열성적이었다. 암 선고와 별세는 그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홍씨는 현재 뉴욕에서 열세 살인 막내 아들 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한 측근은 “슬픔이 상당히 깊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 다시 무대에 서는 시점은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예원학교 재학 중이던 14세에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유학해 25세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모차르트의 ‘티토 왕의 자비’로 데뷔했던 홍씨는 ‘롱런하는 소프라노’로 꼽힌다. 뜨고 지는 숱한 가수들과 달리 데뷔 이후 20년 넘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전속 주역 자리를 지켰다. 섬세한 표현력과 서정적인 목소리에 맞춰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 투란도트의 류, 리골레토의 질다 역에서 특장을 인정받았다. “길게 보고 맞는 역만 고른다”는 신념 덕이었다.

홍씨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난해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에바 역에 처음 도전하기도 했다. 슬픔에 잠긴 소프라노의 재기에 오페라 팬들의 관심이 모이는 이유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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