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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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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버지,어머니 자리를 펴놨어요.사랑방으로 모시고 가셔요.』아리영은 방문을 열고 짐짓 자연스레 굴었다.
「어머니」라는 바람에 아버지와 정길례여사는 흠칫 놀라며 아리영을 올려다봤다.
『내일 이자벨이랑 세사람이 우리집에 올 예정인데 날짜를 미루거나 취소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머니도 좀 쉬셔야 할 것같고….』 정여사가 오래 전부터 「어머니」였던 것처럼 「어머니」라는 말 마디를 계속 자연스럽고도 쾌활하게 썼다.
아버지 얼굴에 감동의 밀물이 넘쳤다.
『아니다.그냥 오시게 하자.이 기회에 서로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정여사에게 그녀의 어머니 소식을 전하려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그래서 스티븐슨교수 내외를 소개해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네,아버지.』 아리영이 정여사를 부축해 일으키자 그녀는 와락 껴안고 볼을 댔다.볼이 젖어 있었다.
『고마워요!』 아리영도 눈물이 치솟는 것을 누를 수 없었다.
제 설움에 겨운 것이기도 하다.「신(神)은 두가지를 주지 않는다」했다.아버지와 정여사의 결합은 우변호사와 자신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일러주는 것이리라.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우변호사를 사회적으로좌절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눈부신 그 명성과 사회적 지위에결정적인 상처를 주어서까지 그와 맺어지고 싶지는 않다.
「일」은 남자의 생명이나 다름없다.파스칼은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정념(情念)은 사랑과 공명심(功名心)이라 했다.그러나 인간은 오직 하나의 커다란 정념만을 품을 수 있다고도 못박았다.따라서 이 두가지 정념이 한 인간 안에서 만날 경우 사랑과 공명심은 각기 절반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으리라 내다봤다.하물며공명심이 사랑으로 인하여 치명적(致命的)인 상처를 입게 된다면그 사랑인들 온전하겠는가.공명심과 사랑의 불을 한 남자의 가슴에서 한꺼번에 꺼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밤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 일어났다.정여사의 신열은 내렸을까.시원한 보리차 자리끼라도 넣어 줄걸…하고 후회하며 방을 나섰다.
사랑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비치고 있었다.정여사도 아직 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와인 글라스 병에 차디찬 보리차를 담아 사랑방으로 들고가다 걸음을 멈췄다.정여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열락(悅樂)의 소리였다.절정(絶頂)으로 치닫는,끊어질듯 몰아쉬는 작은 짐승의 몸저리는 소리.어떠한 「타(他)의 개재(介在)」도 허용치 않는,완전한 합일이 거기에 있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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