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보던’ 박정희, 쿠데타 성공 뒤 껄끄러운 관계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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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10면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1918년생)와 대통령 박정희(17년생). 두 사람은 증오의 역사를 썼다.

최홍희와 박정희, 증오 30년

일본 주오(中央)대 법학과 1학년이었던 최홍희는 44년 1월 징용돼 평양의 42부대에 배치됐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 그러나 부대를 탈출하기 직전 그의 조직은 일망타진됐다. 6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뒤 일본 육사에 편입해 3등으로 마쳤다. 44년엔 관동군 소위가 돼 45년 해방을 맞았다.

평양 감옥의 죄수와 일본군 소위로 해방을 맞이한 두 사람의 앞날은 당연히 달랐다. 최홍희의 아들 최중화씨는 “아버지는 늘 박정희를 내려다봤다”고 했다. 군 생활 중 둘이 가끔 만난 것 같다는 게 최씨의 전언이다.

운명은 파도를 타기 시작한다. 61년 3월 초 논산훈련소장 최 소장이 대구 2군사령부에 들렀다가 ‘마지못해’ 박 준장과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회고록 『태권도와 나』에서 ‘사상뿐 아니라 선후배 차이가 심했다’고 했다. 술을 마시며 ‘나라 꼴’을 개탄한 둘은 곧 쿠데타를 계획했고 박정희 사무실에서 모의를 계속한다.

그런데 5·16 당일 최 소장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쿠데타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한다. ‘천지신명이여…박정희가 장본인이란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요절 냈을 텐데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태권도와 나』중에서) 아들 최씨는 “박정희가 쿠데타 시간을 모두에게 속였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래도 박정희는 혁명본부를 찾은 최 장군을 러닝셔츠 바람으로 뛰어나와 포옹하며 ‘고맙습니다. 서울에서 실패하면 각하 계시는 데로 가려 했습니다’라며 맞이했다.

그럼에도 최 장군의 불만은 깊어간다. ‘박정희가 나의 군단장 진급을 막고 이북파를 다 거세한다’고 생각했다. 최 장군은 함북 출신이다. 62년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 소식을 듣고 “간신 말을 듣지 마라”고 면전에서 독설을 퍼붓는다. 소장 전역 환송연에서 박 의장이 “선배님, 섭섭합니다”라고 하자 “이제 의장 주변엔 간신만 모일 것”이라고 공격했다. 주말레이시아 대사로 발령 난 뒤 두 사람의 접촉은 없었다. 그러나 최홍희의 박정희 비판은 계속됐다.

66년 3월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설된 뒤 총재로 취임한 그는 자신이 만들고 키운 태권도가 박정희의 영도력으로 성장했다는 식으로 선전되자 반발했다. 그는 ‘군 시절 나를 각하라 부르며 어려워하던 박정희가 3선 개헌 압력 등을 뿌리치며 복종하지 않는 나를 껄끄럽고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라고 했다. (『태권도와 나』 중에서)

그럴 즈음 김운용 전 IOC 위원이 등장한다. 경호실 출신의 김운용은 박 대통령의 지시로 태권도협회 회장에 임명된 뒤 ITF 운영에 협조하지 않고 사사건건 반대했다는 게 최홍희 측 주장이다. 아들 최씨는 “아버지는 김운용을 ‘숙소 당번을 하던 새까만 후배’ ‘탁구 할 때 공을 잘 주워 왔던 똘똘한 후배’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했다. 자기가 노란띠를 달아 준 김운용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71년 4월 주터키 대사가 ‘나이 먹은 사람은 물러앉고 젊은 사람 차례’라고 한 박정희의 말을 전했다. 김운용이 ITF 총재가 될 것임을 감지한 최는 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한다.

해외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체제를 꾸준히 비판했다. 그럴수록 북한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평양 방문이 잦았고 해외 각지의 반한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두 사람의 화해 기회는 사라졌다. 평생 ITF 총재를 한 최홍희는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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