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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생활경제 활력소 ‘시장’국가가 띄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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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북녘 사회의 경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거의 잣대에서 벗어나 계획경제라는 전체 틀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주민들의 경제생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2년 7월에 시행된 7·1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녘 사회에서 화두로 등장한 ‘시장’에서 출발해 북녘 사람들의 장바구니 경제 속으로 들어가 보자.

2003년 10월 초 평양 고려호텔에서 중구역(평양의 ‘구역’은 남쪽의 행정구역상 ‘구’에 해당)에 사는 30대 중반의 여성 봉사원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시장에는 자주 갑니까?

“중구역에는 시장이 없어 주로 인접한 평천구역 해운동에 있는 시장에 갑니다.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갑니다. 쌀, 부식물 등은 국가의 배급체계를 통해 사서 먹기 때문에 국영상점에 딸리는(부족한) 야채, 잡곡류, 신발 등을 주로 시장에서 구입합니다.”

통일거리에 현대적인 시장건물이 들어섰다는데 가 보았나요?

“통일거리 시장은 한달 전쯤 문을 열었습니다. 시설이 잘 돼 있고, 근처에서 온 주민들로 붐볐습니다. 판매원들은 주로 가정주부나 나이 드신 분이 많습니다.”

시장의 물품가격도 국가가 정합니까?

“물건가격은 품목별로 국가가 정한 기본가격이 있고, 품질에 따라 ‘합의가격’이 정해집니다. 물건값을 깎기 위해 흥정도 합니다. 시장경제를 한지가 얼마 안돼 아직도 익숙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민들이 ‘시장경제’란 말을 씁니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시장경제 아닙니까. 아직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데 익숙하지는 않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7·1조치 이후 시장이 많이 달라졌습니까?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생활이 편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생활비가 농민시장의 물가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이제는 생활비가 많이 오르고 시장에서 다양한 물품을 살수 있게 돼 편리합니다.”

한달에 생활비로 얼마나 받으세요?

“세대주(남편)와 내 생활비(임금)를 합치면 8000원 정도입니다. 달마다 차이가 있지만 쌀 판매소에서 쌀을 구입하는데 월 1500원, 시장에서 부식물 구입하는데 월 2000원 정도, 기타 지출이 3500원 정도입니다. 알뜰하게 쓰면 매달 1000원 내외를 저금할 수도 있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시장은 있었다

이 가정주부는 ‘성과급’을 많이 받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일반 근로자들보다 생활비를 많이 받고 있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평양에서 만나는 다른 봉사원들보다 거리낌없이 시장에 대해 이야기해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다른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시장에 가 봤냐고 물어봤다.

“평천구역 시장에 가서 화장품을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보통 시장에 가시기 때문에 갈 기회가 별로 없고 물건값도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어쩌면 평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일상적 답변일 지 모른다.

살림을 직접 챙기는 가정주부가 아니면 아파트와 전기사용료를 얼마나 내는지, 시장의 물건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아직은 과거의 배급체계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시장의 등장은 주민들의 생활을 점차 바꾸고 있다.

2002년에 만났을 때 “농민시장에 가 봤습니까”라고 묻자 “남자가 시장엔 왜 가냐”고 이상한 표정을 짓던 북의 한 안내원은 2003년 9월에 다시 만났을 때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곤 한다”라고 말했다.

시장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라 평양 시민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2003년 11월 6일 평양서 열린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최영건 북측 위원장(내각 건설건재공업성 부상)은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장마당(농민시장)을 시장으로 고쳤다”라고 말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품목에 대해서도 “장마당에서는 농·토산물이 나왔으나 시장에는 개, 닭, 남새(야채), 무 등 농·토산물 뿐 아니라 최근에는 공업제품도 나온다”라며 “시장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있다”라고 밝혔다.

사실 북에서 ‘시장’이 낯설 이유는 없다. 해방 이후 ‘인민시장’ ‘농촌시장’이라 불리던 시장이 있었고, 국유화가 완성된 이후에는 ‘농민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시장’이란 이름의 시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북에서 사회주의가 완성된 1958년이다.

1958년 8월 발표된 내각 결정 140호에는 농민시장에 대해 “협동농장들의 공동경리와 협동농민들의 개인부업경리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축산물의 일부를 농민들이 일정한 장소를 통하여 주민들에게 직접 파는 상업의 한 형태”로 규정돼 있다.

당시 농민시장은 판매자인 농민들과 구매자인 도시주민들의 생활상 편의를 고려해 원칙적으로 군소재지인 읍과 노동자구, 큰 도시들의 구역 단위에 각각 하나씩 두어 10일장 형태로 운영됐다. 북 당국은 주민들이 농민시장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시장 안에 농민들이 내다 파는 상품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매대(판매대)들과 농산물, 육류, 가금, 수공업제품과 농토산물의 판매장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북 당국은 농민시장에서 농토산물을 위주로 판매하게 하고 공업상품은 반드시 국영상업망을 통해 계획적으로 공급하도록 제한했다.

농민시장이 국영 및 협동단체 상업의 보충적 통로로서 역할을 넘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래 상품의 범위를 일정하게 제한한 것이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협동농장에서 분배받은 것들 중 소비하고 남은 여유 농산물과 개인 텃밭경리를 통해 얻은 농산물을 농민시장에서 판매했다. 이때 거래 농산물 중 식량은 제외됐다.

사회주의계획경제와 시장의 공존. 특히 북 당국은 농민시장의 불법적인 거래를 막기 위해 농민시장을 관할하는 해당 지역 행정 및 경제지도위원회의 상업과에서 농민시장의 이용절차를 주민들에게 교양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의 법적 조치를 마련했다.

북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농업협동화와 산업의 국유화가 완성되고, 국가적 차원의 공급제가 전면 실시된 1950년대 후반∼60년대에 농민시장의 소매상품유통액은 전체 유통액 중에서 1%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농민시장은 국영상업망을 보조하는 대단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역할이 축소되면서 농민시장을 아예 없애자는 주장도 나왔다. 1960년대 후반 일부 북 경제관료들은 “부업생산이나 농민시장이 공동경리에 나쁜 경향을 주고 리기주의를 길러준다”는 이유로 농민시장을 없애자고 했다.

그러나 1969년 3월 당시 김일성 수상은 “(법령으로 농민시장을 금지하면) 장마당은 없어지지만 암거래는 의연히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중략) 농민시장을 강제로 없애고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인민생활에 불편을 주고 숱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죄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농민시장의 역할을 여전히 인정한 것이다.

물론 북의 농민시장은 공식적으로 합법적인 사적 경제활동으로 허용된 것이기는 하나, 완전하게 국가통제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농민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근본인 계획경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고 주민들에게 부수적인 수입을 제공해주는 원천이 되어왔다.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농민시장이 점차 부분적으로 비공식적이고 불법적인 경제활동이 함께 진행됐다는 점이다.

1989년 이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국제무역 시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1990년대 초반 조성된 ‘북핵위기’로 미국의 경제봉쇄조치는 더욱 강화됐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계속된 자연재해까지 겹쳐 북 경제는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특히 전력 부족으로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국가의 식량배급과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주민들은 대부분을 국가에 의존하던 공급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시장은 계획경제의 보완적 역할에서 벗어나 주민들이 먹고, 입고, 쓰는 개인 경제생활을 충족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거래가 금지되던 품목들인 쌀이나 옥수수와 같은 곡물들과 전자제품과 같은 공업제품, 의약품, 수입품 등이 공공연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원래 10일장이던 것도 매일장으로 바뀌었다. 지정된 개장 장소를 벗어나 어느 곳에서나 장이 서고, 너도나도 장에서 장사를 하게 됐다.

농민시장의 기능 확대와 국가의 통제 약화는 ‘사적 부문’의 확대로 이어졌고, 계획경제시스템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농민시장이 국가 당국의 간섭을 덜 받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용인된 사적 활동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불법 활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부작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북 당국은 2001년에 나온 내부 문건에서 “최근 년간에 국가가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직업마저 버리고 장사나 하면서 자기 개인의 리속을 채우는데로 나갔다”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북 당국은 농민시장의 확대로 나타난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1999년 4월에 ‘인민경제계획법’을 채택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했다.

인민경제계획법은 계획경제부문의 규율을 확립하고 그 동안 침체되어 있던 계획부문의 경제활동을 정상화·활성화하고 약화된 국가의 사회·경제 통제력을 회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장, 불온한 단어 아니다
또 북은 현실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농민시장의 역할을 폭넓게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의 국가계획위원회 최홍규 국장은 2003년 4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3월 말부터 평양에서도 각 구역마다에 있는 ‘농민시장’을 ‘시장’으로 부르게 됐다”며 “농산물만이 아니라 각종 공업제품도 거래되고 있는 현실에 맞게 이름을 고친 셈”이라고 밝혔다.

농민시장의 종합시장으로의 변화는 최 국장의 지적처럼 “시장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회주의 상품유통의 일환으로 인정”하는 조치였다. 북 당국이 역할이 커진 농민시장의 기능을 인정해 ‘계획과 시장의 공존’으로 나가기로 공식 결정한 셈이다.
농민시장의 변화과정을 추적한 정은미(서울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이러한 변화는 등소평이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계획과 시장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구별이 되지 않으며,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은 있으며,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의 개혁·개방을 정당화시켰던 것을 연상시킨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북은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2003년 11월 6일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남쪽의 경추위 대표단장이 “시장에 경제를 붙여 시장경제로 부르자”라고 즉석에서 제안하자 북쪽의 최영건 위원장은 “그건 안 된다. (이같은 변화는) 시장 사회주의”라고 응수했다.
‘시장’과 ‘사회주의’의 결합을 의미하는 ‘시장 사회주의’란 용어를 북의 고위관료가 공개적으로 사용한 점이 이채롭다.
특히 최 위원장은 시장 운영에 대해 “국가가 투자해서 평양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건물도 다 꾸려놓았다”며 “개인들도 여유 있는 것은 다 내놓는다”라고 말했다. 국가가 ‘시장’을 장려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북녘에서 ‘시장’은 이제 ‘불온한 단어’가 아니며 과거의 ‘농민시장’으로 불릴 때의 시장도 아니다.

2002년 3월 기존의 ‘농민시장’이라는 명칭을 ‘종합시장’으로 단순히 이름을 바꾼 것과 다른 차원의 변화다. ‘3월조치’가 원래 불법인 ‘공업제품의 농민시장 유통’을 합법화한 조치였다면, 통일거리에 현대적 시설의 시장을 국가가 투자해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국가차원의 시장 확대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1998년 개정된 헌법에서 ‘합법적 경리활동을 통해 얻은 수입’은 개인소유로 인정했기 때문에 주민의 개인소득이 이전보다 더욱 늘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통일거리에 새로 만들어진 ‘통일시장’을 다녀온 인사들에 따르면, 북녘의 시장에서도 남쪽의 재래식 시장처럼 물건값을 놓고 흥정이 이루어지고, 품질과 수요 공급에 따라 시장마다 다른 판매가격이 정해진다고 한다.

평양에서 만난 한 안내원은 “국영상점망을 통한 물자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장 판매 상품은 국정가격보다 비싼 편”이라며 “시장에 나와 물건을 파는 개인이나 기관들은 판매액에 따라 일정량의 매대사용료를 시장관리위원회에 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개인들이 시장에서 큰 규모로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안내원은 “개인이 시장에 내놓는 물건들은 협동농장이나 기관에서 내놓는 것보다 가격과 품질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시장을 시범운영하는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임대형식으로 개인상점을 내거나 몇 사람이 동업해 내는 ‘합의제 상점’을 허가하는 조치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바야흐로 새로운 형식의 ‘시장’이 북녘 경제의 활력소로, 주민들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근원지로 등장하고 있다. 2004년에는 평양의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흥정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정창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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