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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주말을] 세월이 흘러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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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애틋함의 로마
복거일 지음, 문학과 지성사
301쪽, 1만원

 ‘애틋함의 로마’란 책 제목, 참 잘 뽑았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정서는 딱 이 한 마디다. 이국적이고 스산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 복거일의 첫 소설집이다. 과학소설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작가답게 수록작 10편 중 7편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표제작 ‘애틋함의 로마’는 2832년 치열한 전투에 용병으로 참여했다 살아남은 뒤 음유시인으로 방랑하는 마이크와, 전사할 경우에 대비해 스캔해놓은 그의 자료가 실수로 육신화돼 태어난 또 다른 마이크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는 마이크와 스캔 마이크는 동일한 인물일까, 다른 인물일까. 어느 날 스캔 마이크는 연인을 데려온다. 그녀는 젊은 시절 마이크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옛 연인 소니아와 똑같았다. 소니아의 스캔이었던 것이다. 소니아가 마이크를 버렸던 것처럼, 스캔 소니아도 스캔 마이크를 버릴까.

‘내 얼굴에 어린 꽃’은 2998년 혜성의 잔재가 부딪치는 대참사로 로봇만 살아남은 목성의 위성 개미니드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들은 살아남은 사람만 거두어가고 로봇들은 개미니드에 버려뒀다. 그럼에도 한 로봇 아줌마는 인간을 그리워하며 인간의 시체를 비료로 꽃을 가꾼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물을 싫어하는 로봇임에도 꽃을 가꾸며 그 속에서 그리운 친구(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꽃밭에서 인간의 윤회를 발견하는 로봇이 오히려 인간답게 느껴진다.

건강이 악화된 정치인의 대역으로 등장했다가 10년간 대통령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로봇의 이야기 ‘대통령의 이틀’, 보다 나은 유전자를 찾으라며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는 한 남자의 이야기 ‘꿈꾸는 지놈의 노래’ 등 한 편 한 편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빛난다.

작품에는 시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음유시인을 미래 세계에 갖다놓은 작가의 감각 덕분이다. 영어공용론을 펼친 지은이답게 마치 영시를 번역한 듯 이국적인 시다.

‘아, 이제 우리는 아네/모든 사랑의 발길은/애틋함의 로마로 통한다는 것을.//기억하라, 기억하라,/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애틋한 로마’ 중)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엔 미래에 사라져버릴 것들, 어쩌면 이미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짙게 남아있다. 그러나 작가가 정작 말하고자한 것은 ‘변화’가 아니리라.

“사람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세월이 가도 바뀌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은 세월이 흐른다고 바뀌지 않잖아요?”(‘서울, 2029년 겨울’)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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