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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한지 + 보자기로 뉴욕 사로잡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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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집합’ 연작 앞에 선 전광영 씨. 한국적 재료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전광영 스튜디오 제공]

“순수 토종작가가 세계 최정상급 갤러리에 진출했다는 사실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힘이 되길 빕니다.”

4일(현지시간) 오후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부라는 미국 뉴욕의 로버트 밀러 갤러리. 세련된 차림의 뉴요커들은 한지로 만든 독특한 대형 작품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요즘 국내외로 명성을 떨치는 ‘한지 작가’ 전광영(64)씨의 작품들이다.

전씨는 지난 12년간 뉴욕에서 격년마다 전시회를 열어왔다. 그런 그로서도 이번 초대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가고시안·페이스 등과 함께 세계 10대 화랑으로 꼽히는 로버트 밀러 갤러리의 전속작가로서 초대전을 연 까닭이다.

이 화랑은 루이스 부르주아, 쿠사마 야요이, 조지아 오키프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거쳐간 곳이다. “이런 최정상급 화랑에서 국내파인 정씨의 초대전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한국 미술계로서는 일대 사건”이라는게 뉴욕 한인 미술관계자의 얘기다. 이 정도 화랑의 부름을 받으려면 단기간의 성과로는 안된다. 오랜 시간 축적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번에도 화랑 측에서 7~8년간 지켜보다 지난해 전속 및 전시회를 제의했다는 후문이다.

이같은 그의 인기는 작품 내 녹아있는 한국적 정서와 무관치 않다. 정씨는 고서를 잘라 만든 한지로 스티로폼을 싸서 삼각형의 오브제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수천·수만개의 오브제를 화면에 붙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길게는 반년 이상 걸리는 엄청난 노동의 소산인 셈이다.

이런 정성과 함께 그의 작품에는 “싼다는 것의 철학, 즉 우리네 ‘보자기의 문화’의 넉넉함이 담겨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갯수가 딱 맞으면 들어갈 틈 없는 서양식 박스 문화가 아닌, 다 찬 듯하면서도 한두 개쯤 더 넣을 수 있는 게 보자기”라는 것이다.

일관되면서도 시간과 함께 진화해온 작품 성향도 그의 명성에 한 몫 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정씨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그간에는 인류 문명의 쓸쓸함을 상징하는 모노톤 위주의 ‘집합(Aggregation)시리즈’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화면에 푸른 웅덩이 모양을 만들어 넣는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푸른 창공을 연상시킴으로써 인간 문명의 가능성과 희망을 표현하려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씨는 오는 12월에는 미국 코네티컷주 얼드리치 현대미술관에서, 내년 2월에는 일본 모리미술관에서 잇따라 초대전을 갖는다.

홍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69년 도미,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다 한국적인 소재에서 영감을 얻어 20년 이상 한지 작업을 계속중이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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