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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병원에서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서울 시내 관광을 하겠다는 콕 로빈과 스티븐슨 교수 내외랑은서여사에게 맡겼다.몹시 피곤하여 눕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이 온통 구겨진 헌 모시옷 같았다.
내일 아침엔 일찌감치 연풍으로 떠나야 한다.일행은 서여사와 김사장까지 보태어 모두 여섯명.자가용차 한대로는 갈 수 없으니출판사의 9인승 승합차로 함께 가자고 서여사가 제의했다.자리가남는 셈이다.아버지와 동반해서 가도 되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청에서여사는 반색했다.
『물론이죠.아버님이 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에요.사실 외국의 문화인 상대야 아버님 이상 가는 분이 없지 않겠어요?』 서여사는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아버지의 식견(識見)과 인품과 능란한 외국어 실력을 서슴없이 칭송도 했었다.아버지를 보면 「정년퇴직」이라는 제도의 불합리성을실감치 않을 수 없다며 서여사는 늘 한탄하듯했다.
서여사도 독신이고 아버지도 혼자다.결혼까진 몰라도 좋은 친구겸 애인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싶어 소개한 것인데,아버지 마음을 유부녀인 정여사가 곧장 사로잡고 말았다.
남녀간의 일이란 인위로 할 수 없음을 뼈아프게 느꼈다.
정여사의 근황을 아버지에겐 소상히 말하지 않았다.단지 몸이 성치않아 약초원 댁에서 쉬고 있다고 말만 전했을 뿐 「신이 내렸을 듯하다」거나,「가출했다는 어머니가 일본서 무당이 되어 살아있다」거나 하는 실정을 전하기가 왠지 황당하여 입이 떨어지지않았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아버지는 투명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그 끈질긴 어머니의 마녀(魔女) 여행에 한번도 참여치 않았던 것은 휴일이라 할지라도 공무를 제칠 수 없는 처지이긴 했었지만 어머니가 집착하는 주술(呪術)의 세계에 애 초부터 비판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아버지에게 정여사의 일을 알리기가 켕겼다.영락없이 상심하며 당혹하고 우울해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만약 내일 연풍 나들이를 함께 간다면 어차피 서여사에게 그 문제를 의논받게 될 것이다.이젠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김홍도가 3년동안 현감으로 있었던 연풍으로 나들이 안가시겠느냐고 하자 아버지는 선뜻 응했다.
김홍도와 동일인으로 보여지는 일본의 천재화가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옛책이 찾아졌다며 신나하기도 했다.
『아버지.』 저녁식사 후의 차를 들며 아리영은 정색하여 불렀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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