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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촛불의 유령’에 떠는 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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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문을 받아본 사람은 처음 당하는 이보다 훨씬 큰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일까. 청와대가 여전히 겁먹은 얼굴이다. 아직도 ‘촛불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 느낌이다. 여당과 정부도 비슷하다. 판단이 크게 흐려졌다는 게 그 증거다.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열심이다. 엉터리 방송과 괴소문에 의해 유령이 자라났고, 그 모든 것이 허깨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정권의 몸 사리기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수도사업 효율화 방침 번복이 최근 사례다.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8월 24일 적자 투성이의 상하수도 사업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소유권은 지금처럼 지방자치단체가 갖되 운영과 관리는 민간에 맡겨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그는 법안을 다음 달 입법예고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다음 날 이 발표는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백지화됐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전기·가스·수도·건강보험은 민영화는 물론 민간 위탁도 하지 않기로 당 지도부가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지자체들은 수도사업에서 매년 5000억원가량의 적자를 내고 있다. 이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세금으로 틀어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저항세력들은 그때마다 나섰다. 그냥 두면 문제가 악화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촛불시위에서도 그들이 지어낸 수돗물 괴담은 힘을 발휘했다. 정부가 수도사업을 민영화하려고 하는데, 그럴 경우 하루 물값이 14만원에 달한다는 주장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목욕하는 걸 몽땅 생수로 쓴다는 전제였다고 한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계산법이었지만 파급효과는 작지 않았다.

임태희 의장은 수도사업 개혁은 반대가 있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발표 직후 일부 시민단체들은 “수도 민영화를 위한 수순”이라고 주장했다. 홍준표 대표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촛불시위에서 이미 봤듯이 시민단체의 반응은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이들의 허약한 반대 논리를 넘어설 생각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다른 예가 공기업 개혁이다. 촛불시위에는 개혁을 거부하는 공기업 노조원들도 적잖이 참여했다. 그 뒤 이명박 정부의 의지는 용두사미가 됐다. ‘민영화’라는 용어가 어느 날 갑자기 ‘선진화’로 바뀔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다. 8월 11일 발표된 1차 계획에는 319개 대상 기관 중 41곳에 대한 처리방안이 담겼다. 보도자료에 나온 민영화 대상은 촛불시위 직전 정부가 검토했던 약 60개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27개였다.

그러나 이것도 한껏 부풀려진 것이고, 제대로 꼽을 것은 6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21개는 이미 민영화 계획이 발표된 산업은행과 2개 자회사, 기업은행과 3개 자회사를 재탕하고 대우조선·쌍용건설 같은 공적자금 투입 기업 14개를 끼워넣은 것이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더니 국민을 거의 원숭이 취급을 하고 있다.

법인세율 인하계획 연기도 마찬가지다. 기획재정부는 6월 초 25%인 법인세 최고세율을 22%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경기가 어려운 점을 감안해 8월부터 시행하겠다고 했다. 경쟁국인 싱가포르와 중국도 올 상반기에 법인세를 내렸다. 하지만 국회도 열지 못하고 두 달 잘 놀고 난 한나라당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인하 방침을 1년 늦추기로 한 것이다.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곳은 주로 대기업이다. 대기업에 대한 감세를 미뤄 그 세금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감세로 기업투자를 북돋우고, 투자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게 한다는 MB노믹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정책에도 반대는 있게 마련이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시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방향이 옳다면 반대 여론을 설득해야 한다. 각 집단이 자기 이해에 따라 반대할 땐 더욱 그래야 한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작은 비판도 두려워하며, 할 일을 하지 않는다. 직무유기도 보통 직무유기가 아니다.

그런 와중에 하지 말라는 일은 잘한다. 남의 종교는 대충 깔본다. 그래서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분열을 자초했다. 공기업 기관장 공모제는 허울뿐이다. 입맛에 맞는 사람이 올라올 때까지 재공모는 계속된다. 자연 몇 달씩 경영공백이 생긴다. 자그마한 금융 공기업의 임원, 심지어 부장 인사까지 챙긴다. 지난 정권이 박은 ‘사람 못’을 뺀다는 것이 명분이란다. 소신도 철학도 없는 사람들에게 나랏일을 맡겼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심상복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