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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22> 손경식의 문경새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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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축성된 문경새재 제2관문(조곡관)과 아름드리 금강송이 동양화 같은 풍경을 그리고 있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시인 신경림은 장시(長詩) ‘새재’에서 문경새재 서른 굽이를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이상세계로 설정했다. 새조차 힘들게 넘나들 정도로 높고 험한 새재[鳥嶺]를 시인은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새[新]로 해석했던 것이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새재는 500년 동안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소통의 주축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 길에 오른 선비와 임지 행차 길에 나선 목민관에게 문경새재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 넘어야 할 새로운 고개였던 셈이다.

금강송 뒤엔 ‘시가 있는 옛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문경새재 고갯길은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시작된다.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을 비롯해 마패봉 등 백두대간 봉우리를 감싸 안은 성문과 성곽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관문이다. 경운기 한 대 지날 법한 좁은 농로마저 시멘트로 포장되는 요즘에 문경새재 고갯길이 비포장길로 보존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약관의 시절 문경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6년 국무회의에서 ‘문경새재 고갯길은 절대 포장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주흘관에서 조곡관을 거쳐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6.5㎞ 길이의 새재 고갯길은 시가 흐르는 옛길이다. 길섶에는 서거정·김종직·김시습·이언적·주세붕·이황·이이·김성일·류성룡·이수광·김만중·정약용·김정희 등 시대를 풍미했던 묵객들의 시가 목석에 새겨져 있다. 시대도 다르고 걸어온 길도 다르지만 몇 백 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과거 보러 가기 위해 이 길을 걷지 않았을까. 목민관이 되어 새재 한 굽이에서 시 한 수를 남겼을 것이라는 실없는 상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사극 촬영장을 지나자 조선시대 관원들의 숙식 장소인 조령원터가 나온다. 김주영 소설 『객주』의 무대로 한국관광공사가 진행하는 문학기행 방문지이다. 조령원터 건너편에는 고개를 넘던 장사치와 선비들이 국밥 한 그릇에 시장기와 여독을 풀던 주막이 복원돼 반갑게 길손을 맞는다. 주막 인근의 교귀정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정자로 길섶에 뿌리를 내린 노송 한 그루가 운치를 더한다. 이곳을 지나던 김종직은 이름없던 정자에 이 이름을 붙이고 ‘교귀정에 올라앉아 하늘과 땅을 즐기는데/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는 시 한 수를 선사한다.

팔왕폭포로 이름난 용추는 예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로 퇴계 이황을 비롯해 수많은 선비의 발을 붙들었다. 퇴계가 극찬한 큰 바위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왕건과 측근 은부의 칼을 받았던 곳이다. 궁예는 이 너럭바위에 무릎을 꿇은 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이라며 의미심장한 독백을 남긴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진주알처럼 영롱한 조곡폭포를 지나면 제2관문인 조곡관이 주흘산 자락에 안겨 아늑한 풍경을 그린다. 군락을 이룬 붉은색의 금강송과 성문을 뒤로 하면 오른쪽으로 ‘시가 있는 옛길’이 나타난다. 초곡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화강암에 새겨진 김만중·정약용·이언적 등의 시가 나그네를 맞는다.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 문경새재 제3관문(조령관)이 비바람과 안개에 휩싸여 있다.


빗물 떨어져 남한강·낙동강 되는 곳

조곡관에서 제3 관문인 조령관까지는 경사가 꽤 급하다. 부드러운 흙길을 몇 굽이 돌고 돌자 확 트인 공간을 배경으로 선 조령관의 웅장한 자태가 숨을 멎게 한다. 조령관의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괴산이다. 빗물이 조령관 북쪽 지붕에서 떨어지면 남한강으로 흐르고 남쪽 지붕에서 낙하하면 낙동강물이 된다는 전략적 요충지다. 주흘관과 조곡관은 남쪽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조령관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함이다. 때마침 남쪽에서 불어오는 비바람과 산 안개가 조령관을 엄습한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사이의 마찰이 떠올라 괜스레 심사가 어지럽다.

‘문경삼경(聞慶三慶)’이라는 말이 있다. 문경에서 경사스러운 소식을 세 번 듣는다는 뜻으로 홍건적의 난으로 문경에 피신을 왔던 공민왕은 새재에서 개경이 수복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고, 광복을 예감한 역술인 이달은 조곡관에 올라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남북을 연결하고 인재와 물산을 소통했던 영남대로의 문경새재에서 들을 하나 남은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북녘 하늘을 보고 있는 새재 조령관에서 듣는 남북통일의 기쁜 소식이리라.

■ 손경식은=193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법학과와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대학원 졸업. 현재 CJ그룹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한·중민간경제협의회 회장, 환경보전협회 회장, 농촌사랑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FTA민간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위원,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02년 제29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TIP>

■영동고속도로 여주 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문경새재IC에서 나간다. 웰빙도시 문경에는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수두룩하다. 문경종합온천(054-571-2002)은 지하 900m에서 분출하는 황토색의 칼슘중탄산 온천수와 지하 750m에서 솟아나는 푸른색의 알칼리성 온천수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새재 스머프 마을’은 만화영화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오는 버섯 모양의 캐릭터 펜션으로 문경시에서 운영한다. 문경시는 9월 27일과 10월 11일에 ‘문경새재 과거길 달빛사랑여행’ 이벤트를 연다. 자연생태공원에서 주먹밥 먹기 체험을 하고 KBS 촬영장에서 과거시험 보기와 짚신체험을 한다. 이어 맨발로 왕건교를 건너 주막에서 다듬이와 통기타 공연을 감상한다. 참가비는 1만2000원. 참가자에겐 농특산품 교환권을 나눠준다(www.mgmtour.com). 

■문경새재 입구에 위치한 하초동떡갈비(054-571-7977)는 약돌한우오미자떡갈비 전문식당. 약돌한우는 게르마늄과 셀레늄을 함유한 거정석(약돌) 분말 사료로 키운 문경의 특산물. 약돌한우 갈빗살을 곱게 다져 오미자 양념장에 버무려 숙성한 떡갈비를 한 입 베어 물면 육즙이 흘러나올 정도로 감칠맛이 난다.

■문경에는 전통 도자기 분야의 유일한 중요무형문화재인 영남요의 김정옥 선생을 비롯해 도예명장 3명 등 20여 명의 도예가가 전통 도자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문경새재 입구에 영남요와 문경도자기전시관이 있다(문경시 문화관광과 054-550-6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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