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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地圖>문학 18.90년대 신생 문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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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국내외 소설들에서 여러 부분을 옮겨온 명명백백한 표절이다』『맞다.여기저기서 베껴 짜깁기했다.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혼성모방 기법이지 표절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92년 5~6월 표절이냐,새로운 소설적 기법이냐는 논쟁이 본지 지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논쟁의 대상 작품은 신예작가 이인화씨의 제1회 작가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장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누구인가』.전업작가.의사.혁 명가.문학평론가 등 다양한 인물이저마다 장(章)을 달리하며 주인공으로 나서 세기말적 혼란과 갈등의 시대에 「나」의 정체를 찾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참신한 기법」「90년대 새로운 지식인 소설」등 호평이 잇따랐다.그러다 문학평론가 이성욱씨가 작품의 표절부분을 뚜렷이 원문과 대조하며 이 작품이 공지영,일본의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요시모토 바나나 등 국내외 작품을 부분부분 옮긴 것을 확인했다.그래서『따온 흔적을 도처에 숨겨버린 이 작품은 소설적 기법인 차용이 아니라 도용』이라며 『이는 예술 이전의 도덕적.양심적 문제』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같은 주장에 작가 이인화씨는 『혼성모방(패스티시)은 기존 작품을 변형시키되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차용법』이라며 『새로운소설쓰기의 모색을 관행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반론을 폈다.평론가와 작가의 논쟁에 영문학자 김욱동씨가 『기법 적절한 수작으로한국의 대표적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라며 작가편을 들었고 다시문학평론가 유중하씨는『대중문화라는 미명 아래 진정한 창조정신을거부하는 몸짓』이라 비난하고 나섰다.이와같은 본지 지상의 논쟁은 문예지로 확산돼 나갔으나 끝내 결론을 못내리고 아직 문단의숙제로 남겨져 있다.
예전에는 작품 중 어느 부분이 기존의 작품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면 그 작가는 군소리없이 표절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며 물러났다.그러나 90년대 들어서는 베껴 짜맞춘 사실을 당당하게 시인하며 물러서지 않는다.태양 아래 더이상 새로운 것 이 존재하지않듯 독창적인 작품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들이대며.낡은 문학관으로 거기에 맞지 않으면 마녀로 모는 중세의 마녀사냥이라고 기성문단을 공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90년대 접어들 무렵부터 이같이 급격히 무질서와 혼돈에빠진 문학을 나름대로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새로운 계간문예지들이창간됐다.
그 첫 주자는 89년 여름호로 창간된 『작가세계』.「무원칙한타협주의와 구별되는 참다운 의미의 다원성 추구」「평론이나 이론보다 작품 우위」가 창간 명분이다.기존 문예지들의 폐쇄적 섹트주의의 틈새를 파고들며 본격문학을 진작,신생문예 지로서의 활로를 개척하겠다는 것이 다양성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또 『작가세계』는 이문열(李文烈)부터 올 여름호 조성기(趙星基)에 이르기까지 창간호부터 매호 빠짐없이 우리시대 대표작가 혹은 시인 1명씩을 집중 조명해 나갔다.작가의 전기.인터뷰.작가론.작품론.문체론 등 한 작가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며 평론우위의 재단,인상비평에서 벗어나 작가.작품 자체를 지향해 나갔다. 이같이 『작가세계』가 기존 본격문학의 틈새를 파고든데 반해 93년 여름호로 창간된 『상상』은 새로운 문학과 독자층을 과감히 파고들고 있다.『반성이 결여된 물신적 대중문화와 전문주의를 가장한 자폐적 엘리트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그 간극을메우는 비판적 가교』역할을 떠맡으며 『작가적 대중주의,대중적 작가주의를 옹호한다』며 탄생한 잡지가 『상상』이다.
『상상』은 이러한 편집태도에 입각해 문학 뿐 아니라 올여름호에서는 인기그룹 패닉의 인터뷰까지 실을 정도로 종합문화지를 지향하고 있다.또 이인화.장정일.김탁환씨등 젊은 작가겸 이론가들을 내세워 대중문화와 본격문화의 경계를 허물며 새 로운 「대중적 문학이론」을 저돌적으로 모색해 나가고 있다.
한편 94년 겨울호로 창간된 『문학동네』는 정통.본격문학으로정면승부를 걸고 있다.『시대의 모순을 증언하고 인간정신의 고귀함과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문학의 역할은 여전히 계속돼야 한다』는게 『문학동네』의 결연한 입장이다.교조화된 진보주의 문학과 엘리트문학에 반대하면서 특히 날로 발호하는상품적 가치만 따지는 천박한 대중문학에 대한 비장한 출사표를 낸 것이다.
이들 신생 문예지들 역시 신인 배출창구를 갖추고 있다.기성 문예지와는 전혀 다르게 2천만~3천만원의 고액을 내걸고 장편을공모,단행본으로 출간해 신인을 화려하게 문단과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이들 문예지들의 특징.『작가세계』는 92년 이인화씨를 시작으로 장태일.김연수.최문희,그리고 금년도엔 『오렌지』의정정희씨를 배출했다.『상상』은 95년 성낙주씨에 이어 올해는 『푸르른 틈새』의 권여선씨,『문학동네』는 『새의 선물』의 은희경씨를 올 제1회 수상자로 내보냈 다.
이들 문예지들은 이와 별도로 기존 문예지들같이 편집위원들의 심사에 의해 신인들도 내보내고 있다.반년에 한번씩 신인들을 내보내고 있는 『작가세계』는 90년 이진명.김상미씨를 배출한데 이어 지금까지 시인 13명,소설가 6명,평론가 3 명을 내보냈다.『상상』은 소설쪽에서 7명,평론쪽에서 2명을,『문학동네』는시 2명,소설 1명,평론 1명을 배출했다.이 신인들은 모지(母誌)의 지면과 출판지원을 받으며 작품과 평론을 통해 90년대 문학을 다양하게 일궈나가고 있다.
신생 문예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학과 대중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공통된 특징.많이 팔아 그 인세로 고액의 상금을 충당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는 고액의 문학상 전략과 또 세 문예지의 올 당선작들이 모두 베스트셀러권에 올 라있는 것에서도 신생문예지들의 대중지향성은 그대로 드러난다.그러나 이 대중지향성이 기성문단의 따가운 질책을 부르기도 한다.문제는 본격문학의 대중화 혹은 문학의 진정한 새로움으로 대중 독자층을 새로 끌어들이고 있느냐,상업주의로 문학을 대중과 야합하는 일개 소비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느냐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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