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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메달이 당당한 그들, 스포츠 신인류가 반갑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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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10면

오늘로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다. 지난 2주간은 정말 신나는 날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본 국민은 물론이지만 현장에서 뛰는 기자나 선수도 모두 신났다.

손장환의 니하오 베이징<끝>

첫날부터 금맥이 터졌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 없다. 사격의 진종오가 은메달을 땄다. 한국 선수단의 첫 메달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최민호의 금메달에 가려 버렸다. 애틀랜타·시드니·아테네 올림픽 때 같았으면 첫 메달이라고 해서 집중 조명을 받았을 텐데 이번에는 몇 시간 가지도 않았다. 최민호의 첫 금메달도 박태환의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대형 사건에 가려 하루 만에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어지는 양궁과 사격에서의 금메달 소식. 매일 매일이 축제였다. 직장인이 근무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휴대전화 서비스로 주요 경기를 지켜봤다는 뉴스는 베이징에서도 화제가 됐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나타난 한국 선수단의 특징은 첫날부터 순조롭게 메달 행진을 하면서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금메달의 분포가 선진국형으로 바뀌었다는 게 중요한 변화다. 금메달의 대부분이 양궁과 태권도에 치중됐던 과거와 달리 양궁·태권도뿐 아니라 유도·사격·수영·역도·배드민턴 등 다양한 종목에서 금메달이 쏟아졌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올림픽 사상 가장 행복했던 은메달과 동메달리스트’다.

“동메달이 이렇게 값진 줄 몰랐다. (금메달을 딴) 4년 전보다 더 기분이 좋다.”
탁구 남자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유승민이 한 말에서 그 변화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유승민은 아테네 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다. 그가 겨우 동메달에 만족하다니.

그것은 유승민 개인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측면보다 한국 선수 전체의 생각과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차례 올림픽을 취재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는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의 표정이 너무 어둡다는 거였다. 경기가 끝났을 때도 그랬고, 시상식 때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한국 선수들은 울거나 아니면 시무룩했다. 4년간 올림픽을 위해 땀을 흘렸고, 최소한 1년간은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며 금메달을 향해 달려왔던 순간들. 그런데 정상을 바로 코앞에 두고 좌절했으니 그들의 상심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금메달과 은메달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금전적으로도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고 있기에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메달을 따고도 뛸 듯이 기뻐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금메달이 아니면 다 슬퍼해야 하나’ 하는 안타까움을 여러 차례 기사화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바로 2008년에 내 눈앞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은 이번에도 남녀 단체전에서 ‘당연히’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확실하다고 믿었던 여자 개인전에서 한국의 세 선구가 중국의 장쥐안쥐안에게 잇따라 져서 금메달을 놓쳤다. 특히 2관왕 2연패가 거의 확실했던 박성현은 결승에서 8점짜리를 4개나 쏘는 ‘박성현답지 않은’ 플레이로 1점 차 역전패를 당해 충격이 컸다.

하지만 박성현은 “아쉽지만 (은메달도) 값지다고 생각한다. 값진 은메달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금메달을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환한 미소로 금메달리스트를 축하해 줬다.

좋다. 박성현이야 이미 금메달을 3개(아테네 올림픽 포함)나 땄으니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유승민도 마찬가지다.

그럼 남현희의 예를 들어 보자. 펜싱 여자 플뢰레에 출전한 남현희는 단신(1m54㎝)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결승까지 올라갔다. 결승에서도 이탈리아 선수와 대등한 경기를 하다가 아깝게 1점 차로 졌다. 이 경우 이전 같았으면 억울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해야 하는 게 예상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남현희는 “아깝지만 후회 없는 게임이었기에 은메달에 만족한다”는 말을 했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은메달에 만족한다니. 한국 선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 탁구도 마찬가지다. 단체 준결승에서 ‘중국도 아닌’ 싱가포르에 2-3으로 졌을 때 이미 ‘맛이 갔어야’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일본을 3-0으로 꺾고 동메달이 결정됐을 때 김경아의 표정은 금메달리스트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를 국내 선발전에서 꺾고 올림픽에 출전한 유도의 왕기춘. 금메달에 대한 부담이 컸기에, 결승에서 불과 13초 만에 어이없이 한판패를 당했기에 그는 통곡 할 수밖에 없었다. 시상식 내내 시무룩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늘 보아 오던 은메달리스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민도 달라졌다. “이원희가 나갔으면 금메달이었을 텐데”라든지 ‘10초 사나이’라는 빈정거림도 없지 않았지만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괜찮다. 아직 스무 살이다” “갈비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결승까지 진출한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격려와 찬사가 쏟아졌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상황이다.

부상으로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바벨을 놓지 않았던 역도의 이배영은 비록 실격을 당했지만 금메달리스트 못지않은 사랑과 격려를 받았다.

무엇이 이렇게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수영에서 박태환이란 명품이 탄생하고,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라는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신인류 시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은 확실히 선배 세대와 생각과 행동이 모두 다르다.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우승한 스무 살 청년 이용대의 상큼한 윙크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가벼워 보일 수도 있으나 훈련과 금메달에 찌들었던 선배들에 비해 진화한 것은 틀림없다.

결승까지 다섯 판 연속 한판승으로 첫 금메달을 안겨줬던 유도의 최민호를 보자. 평소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펑펑 울어 버렸던 최민호, 그는 “운동하는 게 너무 좋았고 지쳐서 쓰러져도 행복했다. 훈련 그 자체가 행복의 연속이었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트럭에 뛰어들 생각까지 했다”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말과 비교해 보라.

어느새 우리 젊은이들은 예전에 우리가 부러워했던 선진국 선수들을 닮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훈련을 즐기고, 최선을 다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이 시점에서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혹시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한국이 올림픽 첫날부터 금메달을 딴 것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16년 만이다. 5~6일간 노골드 행진을 했을 때 은메달리스트에게 쏟아졌던 비난을 기억하는가. 은메달리스트는 죄인이었다. 만일 그때 지금과 같이 “최선을 다했기에 은메달에 만족한다”는 말을 했다면 어떤 반응들이 나왔을까.

첫날부터 연일 금메달이 쏟아지니 선수단도 국민도 배가 불렀다. 그러니 은메달도, 동메달도 ‘잘했다’며 박수를 쳐 주진 않았을까.

중국의 경우를 보자. 초반부터 역도·사격·유도·탁구·배드민턴 등에서 무더기 금메달이 쏟아졌다. 수영·조정·요트 등에서도 귀한 금메달을 캐냈다. 미국의 추월을 걱정했는데 미국이 육상에서 의외로 부진하면서 일찌감치 종합 1위를 굳혀 버렸다.
중국이 육상에서 유일한 금메달을 기대했던 110m 허들의 류샹이 부상을 이유로 기권했다.

농구의 야오밍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스타. 13억 중국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류샹의 기권은 중국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비난이 쏟아질 줄 알았다. 초반에는 그랬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격려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물론 중국 당국의 ‘여론 조작’ 의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배부른 자의 아량’쯤으로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신인류의 탄생’을 4년 후로 보류한다. 그때도 선수나 국민이 지금과 같은 당당하고 멋있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초반에 금메달이 나오지 않더라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즐길 수 있다면 정말로 ‘올림픽 선진국’을 축하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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