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자들의 질투, 여자보다 무섭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6호 03면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례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는 이동관 대변인의 모습. 뉴시스

수시로 비서들을 호출하는 이 대통령이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찾는 비서가 누굴까.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는 이 대변인을 첫째로 꼽는다.
권력의 척도를 최고 권력자와의 물리적·공간적 거리로 정의한다면 그는 명실상부한 파워맨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셈이다. 원만한 성격의 그가 입방아에 자주 오르는 이유가 궁금해 그에게 직접 물었다.

KBS 회동 시비에 휘말린 ‘이명박의 남자’ 이동관

-왜 그렇게 자주 구설에 오르나.
“매일 얼굴이 TV에 나오고, 대통령과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화면에 자주 비치고, 뭐 그런 것 아니겠나…. 남자의 질투는 여자보다 강하다.”

-진짜 그렇게 센가.
“나는 스스로 발광(發光)하지 못하는 ‘월광 소나타’다(웃음).”

-기요틴 위에 위에 있다고 했는데 두렵지 않나.
“늘 조심하고 자제한다. 내 철칙이 인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누구 만나실 때 대통령실장이 많이 배석하고 나는 가급적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너무 민감한 문제는 차라리 안 듣는 것이 낫다.”

그는 청와대 비서진 재산공개 때 동아일보 기자 시절 동료들과 함께 구입한 춘천 농지 때문에 야당의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농지 매입이 도덕적으로 큰 흠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하더라도 ‘6·20 청와대 숙청’에 충분히 휩쓸릴 만했다. ‘강부자’ 내각 파동에 곤욕을 치렀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청와대 내부에서 이 대변인에 대한 유임 기류는 시종일관 확고했다고 한다.

그의 돋보이는 덕목은 문제의 주변을 겉돌지 않고 핵심을 찌른다는 점이다. 두세 시간씩 이어진 회의를 마친 뒤 곧바로 기자들 앞에 섰을 때도 정확히 포인트를 짚어 낸다. 그의 군더더기 없는 요약 능력은 이 대통령은 물론 출입기자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전날 과음해도 오전 7시면 반듯하게 2대8 가르마를 타고 사무실에 출근하는 모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을 연상케 한다.

쇠고기 정국을 타고 확고해진 그의 발언권은 2기 청와대에서 더욱 확대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 민감한 이슈였던 봉하 마을 기록 유출 사건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이후 그에 대한 이 대통령의 평가는 더욱 후해졌다고 한다.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과 곽승준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등 이른바 ‘창업 공신’들이 물러난 2기 청와대 비서실에서 그는 선임자로서 구성원을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평이다. 다른 수석들이 이 대변인에게 정치적 판단을 묻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마찰 마다 않는 브리핑
재주가 많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그는 실수도 잦다.
3월 5일 오후 3시 청와대 정례 브리핑이 열렸다. 이날 오후 4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떡값 수수 폭로 기자회견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김 변호사의 기자회견 이후 보도하는 조건으로 사전 논평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한 시간 뒤 다시 브리핑장으로 오느니 서로 편의를 위해 미리 하겠다”며 “김 변호사가 거론한 국무위원과 일부 수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혀 떡값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하지만 기자회견이 있기도 전에 청와대가 관련 내용을 파악해 사전 논평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두고두고 야당과 시민단체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공무원 사이에서도 그의 브리핑 방식을 놓고 많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외교통상부 간부들은 “상대방이 있는 외교 문제를 너무 깊숙이 공개한다”며 공공연히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외교부에선 5월 이 대통령의 중국 방문 시 불거진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한·미 동맹은 구시대 유산 발언’ 파문과 부시 미국 대통령의 7월 방한 취소 등 사안이 생길 때마다 이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이 대변인은 “외교부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표시하기도 했다. 외교부와 이 대변인의 불편한 관계는 청와대 2기 비서진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청와대 주변 참모들의 시기와 질투·견제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임 속에 이 대변인의 주가는 올라 갔다. 그러던 차에 ‘KBS 회동 파문’이 터진 것이다.

이번 일은 17일 저녁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이 대변인과 정정길 대통령실장,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등 여권 인사와 유재천 KBS 이사장 등 KBS 전ㆍ현직 고위 관계자 4명이 만나면서 시작됐다. 이날 자리에는 유 이사장 외에 김은구 전 KBS 이사, 박흥수(전 KBS 이사) 강원정보영상진흥원 이사장, 최동호(전 KBS 부사장) 육아TV 회장 등 KBS 출신 인사들도 함께했다. 이 중 김 전 이사는 유력한 KBS 신임 사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21일 KBS 이사회가 추린 5명의 후보에도 포함된 상태다.

이 대변인은 “KBS개혁에 대한 의견을 같이 들어보자고 최 위원장이 제안해 이뤄진 회동”이라면서 “사장 인선 관련 얘기는 일절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이날 모임이 알려지면서 야당과 시민단체, KBS 노조 등은 “정권의 방송 장악 음모가 사실로 드러났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23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이 대변인의 사퇴를 정식 요구했다.

추석 민심을 겨냥한 이 대통령의 ‘반전 드라이브’가 강하게 추진되고 있는 와중에 터진 대형 악재에 여권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한나라당 김용태 의원은 “이날 만남을 두고 야당이 방송 장악 음모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면서도 “민감한 시점에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KBS 사장 후보를 만난 것은 적절치 못한 처신이었다”고 지적했다.

판세 읽기 뛰어난 ‘요약의 귀재’
기자 시절 그는 팩트 파인딩에 철저한 민완 기자라기보다 판세를 정확히 읽고 취재원 관리를 잘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민주당 의원들과도 두루 교분을 쌓았다. 그는 지난해 이명박 대선 캠프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직후 권노갑 전 의원을 찾아가 캠프 합류 사실을 알릴 만큼 동교동계 정치인들과도 가깝다.

그를 잘 아는 한 언론계 인사는 “이 대변인은 신문기자 시절에는 정치인처럼 폭넓은 인맥을 유지했고,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신문기자처럼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멀티 플레이어”라고 평했다. 지나치게 단정한 외모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얘기도 듣는다. 성격은 낙천적이면서 배포가 있는 편이라는 게 주위 평가다.

촛불 사태로 청와대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6월. 그는 수석들 사이에서 ‘만만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러다가 큰일 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교수 출신 수석들에게 “침착해라. 정권 안 무너진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지율이 올라온다”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의 정치적 지향점은 어디일까.
그는 올 초 총선에 출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울 서초갑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무렵 그는 “김근태(도봉 갑) 의원에게 도전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강단도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우리 정치사에서 청와대 대변인은 당 대변인과 달리 정치적인 자립이 쉽지 않았다.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권의 상징처럼 자리매김된 게 오히려 정치적인 부담이 된 탓이다. 그런 점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명박 정권의 성공과 나는 같이 갈 수밖에 없다.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넘지 못하면 나는 결코 정치에 뛰어들 수 없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의 냉엄한 정치현실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사석에서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더라”고 털어놓았다. 권력의 정점 근처에 서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그 또한 느끼고 있다.
4년 반 뒤 그는 여전히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인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