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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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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죽음을 통찰한 거친 ‘시어 펀치’

예심 도중 재미있는 말이 나왔다. 이영광은 “사진과 시가 거의 일치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체구에 한때 덥수룩하니 턱수염까지 길렀었다. 그만큼 “거칠고 힘이 있는 목소리”(문혜원 예심위원)를 낸다.

‘인간 以上의 체급으로 제 몸뚱이를 불린 아귀들이/주름잡는 짐승 우리에서 하여간, 조또/살아야 하니까’(‘무소속’ 중)

‘그 새끼가 또 나오다니?/이게 게임이냐 종교 집회냐? 부자가 어떻게 빈민을 구해 주나?/이 요란한 판타지에는 너무도 빤한 그, 리얼리티가 없다’(‘2007-카불, 세렝게티, 청량리’ 중)

땅을 사랑했다는 장관 후보자의 변명은 ‘엉겁결에 하필이면 사랑 속으로 위장 전입한 사랑’(‘이상한 사랑’ 중)이란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 봉헌’ 소동에 빗대 대통령을 ‘제 神에게 제 나라를 부동산으로 바치려는 자’(‘현기증’ 중)로 표현했다. 시어로 만나기엔 좀 거칠다 싶으면서도 통쾌한 맛이 있다.

“언어 자체의 빛깔이 나빠지는 건 괴로운 일이죠. 하지만 그땐 거칠고 강경한 어휘를 써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의 전공은 사회비판이 아니었다. 문태준 예심위원의 표현대로 “죽음을 흠향하는 시인”이었다. 대표작인 ‘검은 젖’을 비롯해 최근작도 절반 이상은 죽음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성질이 조금씩 변해왔다.

“죽음에 압도당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오랫동안 그 문제를 다뤄왔는데 ‘검은 젖’이나 ‘고사목 지대’같은 시에선 조금 숨통이 트였어요.”

‘나는 죽음의 희끗희끗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숨 멈추고, 검은 젖을 깊이 빤다’(‘검은 젖’ 중)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판도는 변해도 생사는/상봉중에서도 쉼 없이 상봉 중인 것/여기까지가 삶인 것’(‘고사목 지대’ 중)

‘검은 젖’은 죽음의 색이지만 생명을 이어준다. ‘고사목 지대’에선 죽음까지도 삶의 영역으로 포괄된다. 시인은 한때 ‘무대 위에서 잠깐 어른거리는 것은/幕 뒤의 오래고 넓고 깊은 어둠에 잠기기 위한 것.’(‘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중)이라고도 노래했다. 삶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 오히려 죽음이 본질이란 생각에 오래도록 사로잡혔던 게다. 그러나 암투병 중인 후배 시인이 치료를 받고 호전되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면도로 민 머리에 예쁜 수건을 쓴 마른 몸이 생각났다/젖과 자궁을 들어내고 젊은 죽음 냄새를 풍기는 몸들이 생각났다’(‘詩人들’ 중)

“삶이란 건 뭔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라는 쪽으로 전환 중이랄까요.”

시인은 무덤 밖으로 걸어나왔다.

“당장은 삐뚤빼뚤한 게 많이 보였습니다. 생계든 공동체의 안위든, 시간이 지나면 개인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잖아요.”

세상이 조금은 달랐으면 하는 바람이 그에게 거친 시를 써내게 했다. 그건 “시도, 저도 살아야겠다”는 선언이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나쁜 놈’ ‘착한 놈’ … 인성의 뿌리 찾기

 심호흡이 필요하다, 백가흠의 소설을 만나려면. 심장이 약하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노모를 폭행하는 아들, 애인을 감금하고 때리는 남자, 아내를 죽이는 남편을 읽어야 하니까. 반성을 해도 용서가 어려운데 이 ‘나쁜 놈’들에겐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소유가 되냐”고 물으면 “사랑이 고통이라는 걸 왜 모르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괴리감은 공포다. 물론 ‘나쁜 놈’만 있었던 건 아니다. 버려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미스터 홍(‘웰컴, 베이비!’), 노모의 똥기저귀를 갈아주는 조대리(‘조대리의 트렁크’)가 있었다. 그러나 공포영화처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백가흠의 세계에서 탈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당연한 진리만 번뜩일 뿐.

이번엔 숨을 좀 돌릴 수 있게 됐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못하는 ‘나쁜 놈’ 근본이 아니라 근원이 주인공이다. 때밀이 근원의 매력은 “때가 안 나와도 언제나 똑같은 힘을 쓰는”데 있다. 그 우직함 덕에 트로트 가수 캐쉬의 매니저가 되고, 돈도 벌어 명품으로 치장할 수 있게 됐지만 근원은 여전히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걷고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는다. 캐쉬를 향한 묵묵한 사랑도 변함 없다. “소박함을 잃지 않는 매력적인 캐릭터”다.(심진경 예심위원) 이 남자가 자신의 근원, 죽어가는 어머니를 찾아 떠난다. 빈 손이 아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위해 마련한 돈이 있다. 전에 없던 ‘훈남’이다.

“내가 그 인물들을 견디기가 너무 버거워졌어요.” 그 동안 쓴 소설을 들춰보면 무섭다며 백가흠은 웃었다. 근본이 작가의 예전 시각이라면, 근원은 요즘 시각이다. “공간이 만들어내는 한계, 그 한계 안에서의 인간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뀐 거죠. 근원과 근본은 한 배에서 태어났고,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완전히 다르잖아요. ‘환경이 다가 아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에요.”

‘폭력이 꼭 폭력을 부르는 건 아니다’는 새로운 탐구다. ‘그런, 근원’을 통해 작가는 물음을 던진다. 사회적 존재가 개인의 의식을 결정하는 걸까, 아니면 개인의 의지가 사회의 그것을 뛰어넘는 걸까. 이 오랜 논쟁을 백가흠식으로 풀어내는 중이다.

인터뷰 말미에 불쑥, 여행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재작년 겨울인가, 파리에 있었어요. 너무 외롭고 정말 너무 추운데다 불어를 한 마디도 못했죠” 뒤이은 말에 웃음이 터졌다. “TV에 마돈나가 나오는 거에요. 내가 아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너무 반가워서 마구 울었어요.” 혼자 떠나는 여행은 외로워서 더 이상 못 가겠다며 손사래를 친다. 어지간히 추웠나 보다.

잔혹했던 작가의 인물들도 더듬더듬 동행을 찾고 있는 중이다. 백가흠을 읽는 것이 공포영화 보는 것 같았다면 실눈을 떠도 될 것 같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패륜에 ‘악’ 소리만 질렀다면, 펑펑 눈물이 쏟아질 지도 모를 일이다. 백가흠이 마돈나를 만났을 때처럼.

글=임주리 기자, 사진=김정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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