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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하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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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프랑스 파리엔 두개의 파리가 있다.하나는 땅위의 파리,다른 하나는 땅속의 파리다.파리 지하는 구멍투성이다.지하묘지와 하수도,그리고 지하철이 개미집처럼 뚫려 있다.지하묘지는 옛날 채석장이었던 동굴들이다.1785년 파리시는 시내에 흩 어진 무연고묘지를 정리,유골들을 지하동굴로 옮겼다.현재 약6백만명분의 유골이 납골돼 있다.관광객들은 화려한 지상의 파리와는 전혀 다른사자(死者)의 도시 파리를 볼 수 있다.
지하 파리의 또 하나 볼거리는 레제구,즉 하수도다.파리의 거리수만큼 많은 하수도가 끝없이 뻗어 있다.뿐만 아니라 전기.가스배관.진공우편배달통로 등도 하수도를 통하고 있다.하수도마다 고유한 거리명과 지번(地番)이 붙어 있다.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도 파리 하수도가 등장한다.센강 수위가 높은 때를 제외하곤 연중(年中)공개된다.관광객들은 보트에 몸을 싣고 「하수도관광」을 즐긴다.
하수도의 등장은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인더스문명 유적인 모헨조다로엔 도로 양편에 벽돌로 된 하수도가 질서정연하게 남아 있다.각 가정의 수세식 변소에서 배출된 오물과 생활오수를 모으는 오수관(汚水管)과 빗물을 모으는 우수관(雨水管)이 구분돼 있었다.고대로마시대에도 하수도는 도시건설에 있어중요분야였다.그러나 중세 들어 하수도 건설은 쇠퇴했다.역사학자들은 중세에 각종 역병(疫病)이 만연했던 것은 하수도시설 미비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근대적 하수도의 출발은 산업혁명 이후다.산업화과정에서 인구가도시에 집중했지만 도시위생은 극히 열악했다.산업혁명의 발상지였던 영국 맨체스터는 하수도라곤 없이 도로에 오수.오물이 흘러넘쳤다.1831년 영국을 휩쓴 콜레라는 하수도의 필요성을 제고시켰으며,그후 하수도 건설이 활기를 띠었다.현재 영국의 하수도 보급률은 95%에 달해 세계 제일이다.
우리나라 하수도 보급률은 45%로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그나마 하수관이 낡고 깨져 오수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실제하수처리율은 28%에 불과함이 최근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2020년 우리 경제가 G7 수준에 이를 ■■■漂■■筮漂■벡■획■텍조抹貞■ ■■雙雙始■■■■■■■■■■■■■ ■■■국제2<시론>스승을 낳는 敎職풍토 세상에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직업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아마도 교직(敎職)은 어느 다른 직업보다 권세나 명예,보수 여하에 관계없이 그 자체의 가치 때문에 종사해볼만한 직업일 것이다.
『맹자(孟子)』에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하는 것은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중 하나라고 한 말이 있다.어린이나 젊은이를 가르치고 또한 그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그것보다 더즐겁고 자신의 성취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은 달리 없을 것이다.
반드시 영재가 아니어도 좋다.보통 젊은이들 보다 두뇌가 열등하고 남들처럼 지체가 자유롭지 못한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는 즐거움과 보람의 느낌이 없다면 그것처럼 힘들고답답하고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교직이 힘들다고 해서 사명감(使命感)만으로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다.거기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지 못하면 사명감에 충만한 사람도 지치고 쓰러지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승의 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옛 스승을 생각하고 찾아뵙기도 한다.이 때 스승에게는 제자가 큰 일에 종사하든,작은 일에 종사하든 간에 어른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다.그러나 훌륭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교사들은 존경받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에서 즐거움을 제대로 찾고 거기서 보람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좋은 스승이 많으면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좋은 스승을 많이 갖기 위해 교사들에게 사명감을 강요하고,능률을 높이고자 그들에게 통제를 가하고,자기 자식만 잘 보살펴달라고 금품으로 유혹하고,말없이 자기 일에 도취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이 아무렇게나 대우하는 그런 풍토 속에서는 교사들이 자기 일에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또한 많은 제자들이 존경하는 스승이 생길 수 없다.
가르치는 즐거움은 오락의 즐거움과는 다르다.교사의 즐거움은 그들의 전문성이 발휘될 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그 전문성은 교사의 양성과정에서 길러지고 교육 현장에서 연마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직풍토는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렵다.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이 아무리 훌륭한 교사를 양성해 놓아도 그들이 전문적 수월성(秀越性)을 발휘할 수 없고,아무리 무능한 교사로 길러져도 교육 현장에서 그 무능함으로 인해 문제될 것은 없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직풍토다.
오늘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사들이 통상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 그대로는 그들이 의사.변호사.교수 등과 같은 전문직에 속한다고 평가받기 어렵다.이것은 교사들의 직업적 풍토지만 교사 스스로 책임져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오히 려 교직의 전문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직된 관료체제와 권위주의적 행정에 1차적 책임이 있다.
여기에다 가르치는 교과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 아무나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즉 오늘의 평범한 사회인이 바라보는 「통속적」 교사관(敎師觀)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 교사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가르치는 즐거움을 누리기 보다 투철한 사명감을 강요당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제와 규격화된 직업적 환경속에서 생활해왔다.엄격히 생각해보면 사명감보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사명감은 자신의 의지 밖에서 주어진 것인데 비해 애착은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사명감이 추종자에게 요구되는 덕목(德目)이라면 애착심은 자유인의 마음으로 지니는 태도다.
가르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며 거기에 애착을 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강요받지 않더라도 자신의 직업을 떠나지도 않거니와 더럽히지도 않는다.스승은 이런 풍토 속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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