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아이] 무용의 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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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5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날들’. 한 중국인 친구가 전한 요즘 중국인들의 심정이다.

그럴 만도 하다. 17일에는 하루 사이 금메달이 8개나 쏟아졌다. 평가도 좋다. 전·현임 IOC 위원장 모두 “경기 운영이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개인적인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1일 남자양궁 단체 결승전을 찾았을 때였다. 경기장 입구에서부터 10m 간격으로 늘어선 자원봉사자들은 관람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한국 사람에게는 “안녕하세요”라고 우리말로 인사했다. 경기장 안의 자원봉사자는 선수들의 용모와 전적, 장기 등을 사전에 숙지한다. 자연 관중들의 질문에 막힘이 없다. 이런 자원봉사자가 170만 명이나 된다.

그러나 어디나 ‘옥에 티’는 있다. 늦었지만 꼭 짚고 싶은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개막식의 내용과 형식이다.

우선 문예 프로그램 내용을 보자. 공자의 중심사상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신을, 내용과 의미를 또렷이 드러내는 수법으로 그려낸 점은 탁월했다. 그러나 황금갑(黃金甲)식 처리가 눈에 거슬렸다. ‘황금갑’은 개막식을 총지휘했던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만든 영화다. 물량을 앞세워 호화의 극치를 보여준 작품이다. ‘황금갑식 방식’이 표현하고 싶던 주제는 고대 문명의 우수성과 현 중국의 굴기(<5D1B>起·일어섬) 두 가지였다. 애국주의 교재로 중국 인민들에게 사용하기에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막식에 참석한 외국인 관중과 선수, 각국 정부 요인들, 개막식을 지켜본 세계 관중에게 이런 방식이 적절했을지는 의문이다. 유가(儒家)의 손님맞이 원칙은 겸양과 공손이다. 이 프로그램은 공자를 중심으로 한 고대 문명과 현 중국의 실력을 과도하게 선전함으로써 포용·우정·선의 등 올림픽 정신을 외면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일부 중국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멀리서 온 손님을 모셔놓고 조상의 위대함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온갖 보석을 그 앞에 펼쳐놓은 격’이다.

또 하나는 거짓이다. 개막식 음악 총감독을 맡았던 천치강(陳其鋼)은 “개막식에서 린먀오커(林妙可·9)가 부른 ‘조국을 노래하다(歌唱祖國)’라는 노래를 진짜 부른 사람은 무대 뒤에 서 있던 양페이이(楊沛宜·7)”라고 뒤늦게 고백했다. 이유는 용모였다. 천 감독은 “국가의 이미지를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사실이 드러나기 전까지의 합동 은폐다. 관영 중앙방송국(CC-TV)은 개막식 직후 린을 인터뷰했다. 개막식 전 과정을 사전에 꿰고 있던 CC-TV가 ‘무대 뒤 노래’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진행자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린도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개막식 감독, 그 상급자, 관영 방송이 어린아이까지 끌어들여 단체로 거짓말한 셈이다. ‘국가 이익’이라는 말만 들이대면 모든 것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논리일까. 천 감독의 고백 직후 인터넷에는 “장이머우가 국가를 속였고, 세계를 속였다” “올림픽도 속이는데 누구인들 속이지 못할까”라는 등의 비난 글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 글은 곧바로 삭제됐다.

또 있다. 관중들은 한국 선수단이 입장할 때만 박수를 거의 치지 않았다. 한 한국 언론사의 개막식 사전 보도 이후 중국 네티즌들이 ‘한국 선수단에 박수를 치지 말자”고 결의한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박수를 없앤 순간, 베이징 올림픽이 내건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란 화합과 포용의 정신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중국 관중들은 몰랐을까.

중국의 현인 장자(莊子)는 ‘무용의 용(無用之用)’을 가르쳤다.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은 더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철리다. 중국은 겸손·화합·융화 등의 가치가 국가 웅비의 시점에선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쓸모 없어 보이는 것들이 존재해야 중국이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쓸모 있어진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진세근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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