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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짱과 기개로 ‘마지막 황제’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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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34면

루중린(오른쪽)이 두 번째 만난 푸이의 요청을 받고 항상 유념해야 할 것들을 적어 주고 있다. 김명호 제공

1924년 10월 21일 서북군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은 출정 중이던 22여단장 루중린(鹿鍾麟)에게 회군을 지시했다. 루중린은 교외에서 베이징경비사령관과 회합했다. 다음날 밤 성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루중린은 모두가 꿈속을 헤매는 시간에 총 한 방 쏘지 않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총통부를 봉쇄하고 요소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새벽에 거리에 깔린 병사들을 발견한 시민들은 신병(神兵)이 출현했다고 쑤군댔다. ‘베이징정변(北京政變)’은 성공한 쿠데타였다. 11월 2일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루는 정변의 최대 공로자였다. 펑위샹은 그를 위수사령관에 임명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74> 루중린(鹿鍾麟)

청(淸) 왕조가 붕괴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는 여전히 자금성에서 외국 국가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청실 우대조건’ 때문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것도 사람을 부릴 줄 알고 부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루중린의 눈에 비친 푸이는 애물단지였다. 그를 내쫓고 황궁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한 진정한 공화제의 수립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다들 정신이 없을 때 후다닥 해치워야 했다. 신중을 기한다며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일을 망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루중린은 총리를 재촉해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청실 우대조건 수정안’을 의결케 했다. 내각 출범 이틀 만이었다. “대청 선통 황제는 오늘부터 황제 칭호를 영원히 폐지하고 즉시 자금성을 떠나야 하며 거주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루중린은 11월 5일 아침 군경 40명을 대동하고 자금성을 향했다. 리스쩡(李石曾)도 국민대표 자격으로 동행했다. 리는 “푸이를 내쫓고 고궁을 박물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온 무정부주의자였다. 루는 푸이의 장인인 룽위안(榮源)과 내무부대신 사오잉(紹英)에게 수정안을 건넸다.

푸이의 서명을 받아오고 두 시간 안에 출궁할 것을 명령했다. 부인과 사과를 먹으며 노닥거리다 수정안을 받아본 푸이는 막 한 입 깨문 사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일단 서명은 하고 시간을 오후 3시까지 연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사이 어떻게 해 볼 생각이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푸이의 생부는 수정안에 서명했다는 말을 듣자 쓰고 있던 관모를 벗어 패대기치며 “다 끝났다”고 씩씩거렸다.

이런 날일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 법이다. 시간이 임박하자 사오잉이 황급히 달려왔다. “20분간 여유를 주겠다. 갈 곳을 정해라. 이행되지 않을 경우 징산(景山)에서 대포를 갈기겠다”는 루중린의 말을 전했다. 엄포였지만 효과가 있었다. 룽위안은 포탄을 피한다며 작은 구멍 속에 들어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이날 이후 정신병으로 두 달 간 입원을 했다. 다른 왕공대신들도 비슷한 행태를 연출했다. 푸이는 부친의 집으로 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루중린은 차량 5대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푸이는 두 번째 차에 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선두 차량에서 내린 루중린이 다가왔다. 첫 대면이었다.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푸이 선생, 당신은 황제입니까 아니면 평민입니까?” 푸이는 현명했다. “평민”이라고 답했다. 루의 입에서 “하오(好)”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군인이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내가 보호하겠다.” 이어서 “지금은 중화민국이다. 공민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국가를 위해 뭘 하느냐에 따라 대총통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18세 청년에게 남기고 자리를 떴다.

1961년 10월 9일 신해혁명 50주년 기념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대청제국을 뒤집어엎은 것을 기념하는 식장이었다. 푸이도 정치협상회의 문사(文史)공작자 신분으로 참석했다. 10년간 전범 감옥에서 재교육을 받고 특사로 출감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톈진(天津) 대표로 참석한 루중린을 발견했다. 37년 만에 또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애들처럼 즐거워했다. 루중린은 ‘치위(奇遇)!’를 연발했다. 푸이의 회고록은 1959년까지만 기술돼 있다. 이날의 심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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