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1만4000명의 피란민을 흥남에서 거제도로 탈출시킨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 [사진=김성룡 기자]
그렇게 시작된 구출 작전은 계속되는 적군의 폭격을 뚫고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태우는 데 성공했다. 미 공군도 상공에서 기관총을 발사하고 네이팜탄을 투하하며 탈출을 도왔다. 기뢰를 뚫고 무사히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크리스마스인 25일 마침내 거제도에 닻을 내렸고, 오늘날 ‘메레디스 빅토리 호의 기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4년에는 ‘단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한 세계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 기적을 이룬 주역 중 한 명이 당시 일등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81)다. 정부가 건국 60년을 맞아 선정한 호국 유공 외국인의 한 명으로 방한한 러니를 15일 만났다. 라루 선장은 2001년 작고했다.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그는 이제 백발의 노신사가 됐다. 직접 촬영한 흑백사진을 여럿 펼쳐 보이며 감회에 젖은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어로 계속 ‘빨리, 빨리’라고만 외쳐 댔어요.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총 승무원이 47명이었던 화물선은 갑판이며 화물칸이며 할 것 없이 곧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상황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도 물도 의사도 전기도 없었죠. 하지만 사흘 후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했어요. 이 피란민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걸 희생하고 목숨을 걸고 탈출했던 겁니다. 노인들과 아이를 업은 여성들은 물론 동생을 업은 8세 아이도 있었어요.” 그 와중에 5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일도 겪었다. “피란민들 중 여성 몇 명이 나서 출산을 도왔죠. 결국 거제도에 내렸을 땐 1만4000명 하고도 다섯 명이 오히려 더 늘어난 사람들이 자유를 찾은 셈입니다.” 그가 당시 직접 촬영했던 흑백사진을 보여 주며 갑판을 가득 메운 피란민들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자유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피란민들이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이후 기적의 주역들은 한·미 정부로부터 각각 표창을 받았다. “흥남 철수는 절대 잊히지 말아야 하는 위대한 일”이라고 강조한 러니는 특히 라루 선장에 대한 감회가 깊었다. “당시 그런 결정을 내렸던 이유를 물었더니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고 답하더군요.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라루 선장은 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고국으로 돌아가 가톨릭 베네딕트회의 수도사가 됐다. 미 뉴저지 세인트폴 수도원에서 2001년 생을 마감했다.
“지난 60년간 한국과 한국인들이 이뤄 낸 위대한 성공이 대단히 인상적”이라는 러니는 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도 기원했다.
“여러 세대가 지났으니 아마 100만 명이 넘는 후손이 살고 있겠지요.” “전쟁을 겪어 보고 드는 생각은 역시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한국 전쟁에서만 남북 양측을 합해 수백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런 처참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죠.”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했던 그는 2006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기도 했으며 지난 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기도 했다. 미국 집에 항상 태극기를 걸어 놓는다는 그는 아들 알렉산더를 데리고 비무장지대 등을 방문하고 다음주 출국한다.
글=전수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1950년 12월 병력 10만, 피란민 10만 선박 이용 철수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를 가득 메운 피란민들. [중앙포토]
앞서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보병사단의 3만여 병력은 흥남 철수를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얼어붙은 개마고원의 장진호 주변에서 중공군 제9병단 12만 병력의 진출을 막아냈다. 한국군 카투사도 함께 싸웠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2500여 명의 전사자와 5000여 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혹한으로 7500명은 동상을 입었다. 미군은 이를 ‘초신호(장진호의 일본식 발음) 전투’라고 부르면서 “미군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