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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순항 조선업 3년 뒤가 불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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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국내 조선업계에 ‘성공의 저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조선업은 2000년에 수주물량에서 일본을 제쳐 세계 정상에 오른 뒤 10년 가까이 호황을 누렸다. 올 상반기 세계시장 점유율(발주량 기준)이 50%나 될 정도다.

그런데 이달 초부터 선박 계약 취소 사태가 벌어졌다. 대우조선해양(컨테이너선 8척)과 현대미포조선(석유화학 제품 운반선 4척)의 계약이 잇따라 취소됐다. STX조선도 유럽 지역 선주와 맺었던 2000억원 규모의 벌크선 2대의 공급 계약이 해지됐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선박을 발주했던 회사들이 건조 자금을 대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앞으로도 계약 취소 사태가 더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안팎으로 국내 조선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조선업협회의 한장섭 부회장은 “대형 업체들은 이미 3년치 일거리를 확보하고 있을 정도”라며 “최근 잇따라 해약된 계약도 곧바로 해외의 다른 업체로 대체돼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등에 따른 세계 경기 둔화세로 조선시장의 거품까지 꺼지면서 발주량 감소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선업 호황은 세계 경제가 그동안 5% 내외로 성장하면서 물동량이 빠르게 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각국의 에너지 소비량이 늘면서 고부가가치선인 초대형유조선(VLCC)· LNG(액화천연가스)선·해양설비(드릴십·시추선)의 수요도 덩달아 급증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과 인도, 베트남 등 신흥시장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서 세계경기가 하락세로 반전하고 있어 더 이상 조선업 호황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산업연구원 홍성인 박사는 “최근 발주량이 준 것은 1970년대 초 만든 선박의 대체수요가 지난해 말로 끝났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는 내리막길만 남았다”고 빗댔다. 여기에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에도 대형 조선소가 잇따라 건설되고 있어 과잉 설비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2010년이 고비= HSBC은행은 최근 조선업 전망 보고서를 통해 “선박 건조는 2010년을 고비로 하락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이 향후 2년 내에 신조선박 건조 능력이 2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2010년이면 중국이 대형선을 건조할 수 있는 도크 수가 23개나 돼 현재 15개인 한국을 앞선다는 설명이다. 중국의 기술 수준도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고 있다.

LIG 투자증권의 김현 애널리스트는 “중국의 기술은 현재 국내의 60~70% 수준이지만 3~4년 뒤면 95% 수준까지 따라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국내 대형 업체는 해양설비나 LNG선 등에서 기술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중소형 조선소는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은 지난해 세계 선박 시장에서 이미 36%의 점유율로 일본(28%)을 제치고 한국(39%)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중국기계산업연합회는 “중국이 2010년께 세계 최고의 조선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98년부터 세계 조선 1위 국가를 목표로 양쯔강 남·북의 조선소를 통합해 중국선박공업집단공사까지 세웠다. 기존의 낙후된 생산시설을 퇴출시키고 대규모 설비투자를 하고 있다.

◇정상을 지키기 위한 전제조건= 동서증권의 조용준 리서치센터장은 “현재 국내 조선업은 건조 능력과 기술 면에서 1등일 뿐”이라며 “세계시장을 창출하고 리드할 수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국내의 원천기술 확보 등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건조 능력에서 우위를 보이는 LNG선이나 시추선의 경우 핵심 기술은 미국·유럽에서 수입하고 있다. 또 해양설비 역시 시추장비·저장공간 등을 디자인하는 기술은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목포대 김영훈 교수는 “현재 해양설비 건조비의 40% 정도가 기술 사용료로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또 우수인력 확보도 숙제다. 세계 조선시장을 30여 년간 이끌었던 일본의 경우 우수 인력이 조선산업을 기피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현재 일본 내 조선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이 10여 개에 불과하고 졸업생 중 조선업에 뛰어드는 비율도 10% 남짓이다. 국내에는 아직 22개 대학에 조선 관련 학과가 있고, 졸업생 중 85% 정도가 조선업에 취업하고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인력의 양적 수급문제는 일본에 비해 아직 양호하지만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뛰어난 이공대생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2년새 20개 업체 새로 생겨
제살깎기 경쟁만 심해졌다

“요즘 남해안에 새로 생기는 조선업체의 숫자를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한국조선공업협회 관계자의 토로다. 10년 가까운 국내 조선업의 호황과 더불어 중소형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부산~통영~목포 등 남해안 일대에서는 최근 1~2년 사이 20여 개 업체가 선박 건조사업에 뛰어들었다. 세계 조선 경기 호황으로 일감이 넘쳐나자 기존 중소 조선소들이 생산설비를 대대적으로 증설하고 있다. 또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 등에 블록(하청을 받아 선박 일부분을 제조하는 것)을 납품하던 회사들이 잇따라 직접 건조 사업에 뛰어든 결과다. 특히 지방자치단체들도 조선업체 유치 경쟁에 나서 싼값에 조선소 용지를 공급하는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업체들은 국제원자재가 급등에 따른 후판 가격 인상과 고유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필요한 기능인력이나 설계인력 부족 현상까지 겹쳐 업체 간 스카우트전이 치열하다.

10개 신생 조선업체로 구성된 한국중소형조선협회의 채영일 사무국장은 “신흥시장의 성장과 선박 노후화에 따른 수요 증가를 예측하고 뛰어들었지만 조선경기가 곧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에 신생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대형 조선업체의 한 관계자는 “향후 1~2년은 일감이 있어 어려움이 없겠지만 발주 물량이 줄면 곤경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조선공업협회 측도 “비록 중소업체들이라지만 막대한 자금을 들여 만든 건조 설비가 과잉상태로 빠진다면 국내 조선업 전체의 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 이들의 투자 자제를 유도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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