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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地圖>문학 13."현대문학"의 문인들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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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71년8월『현대문학』(이하 『현문』)은 지령(誌齡)2백호 기념호를 꾸며냈다.그러자 각 신문들은 사설등을 통해 『우리 문학사상 기적적인 경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55년1월 전후 황무지 문단에서 순수문예지로 태어나 한 호도결간없이 2백호를 기록한 것이 경이일 수밖에 없다.또 당시 문단 인구의 반 가량인 2백여명의 문인들을 『현문』이 배출해내고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엄정한 편집 태도로 문학의 권위를 확립하며 발표지면을제공한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결코 빠뜨릴수 없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문』은 70년대 들면서 그 문학적 지위를 크게 위축당한다.계간지지만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등의 창간이 『현문』의 독보적 지위를 잠식해 들어갔다.66년1월창간된 『창작과 비평』은 문학의 역사적.사회적 소명의식과 예술적 전위정신을 기치로 내걸었다.70년9월 첫호를 낸 『문학과 지성』은 국수주의를 극복하고 문학과 지성의 자유를 들고 나왔다. 물론 두 계간지가 의도적으로 겨냥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기치는 『현문』의 보수적.순수문학적 태도에 배치되는 것이다.또당시 군사독재가 장기화 기미를 보이고 산업화.도시화로 전통사회가 급속히 붕괴되고 곳곳에서 사회문제가 터지고 있어 문학도 순수주의에만 안주할 수는 없게 됐다.
그러한 시점에서 지령 2백호를 맞은 『현문』에는 최고 권위의최장수지라는 실증적 위치에 대한 상찬과 함께 편집방향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편집태도의 보수성이 균형있는 문학 발전을 막는다는게 그 첫번째 지적이었다.
「문단의 공기(公器)」임을 너나없이 인정하는 『현문』의 보수적.순수문학적 고집은 진보적.실험적 노력에 본의아닌 압력을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추천위원들이 원로급들로만 고정돼 있어 전통을 이을 수는 있지만 신인 발굴의 폭이 지극히 좁아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또 이렇게 배출한 문인들 위주로 지면을 제공,『현문』이 공기의 역할을 못하고 순수문학동인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지령 2백호에서 이미 이형기(李炯基)시인등에 의해 심각히 제기됐다. 그러나 『현문』을 창간 때부터 81년 타계할 때까지 편집 책임을 맡은 조연현(趙演鉉)씨는 그의 말처럼 『당대의 비판보다 후대의 공정한 평가』에 맡기는 순수.보수 지향의 엄격한 편집태도를 견지해 나간다.
70년 1월호에 시『구약』을 추천완료해 이건청(李健淸)씨를 내보낸 『현문』은 70년대에만 81명의 시인을 배출한다.이때 등단한 주요 시인들로는 신달자(愼達子).이기철(李起哲).김정웅(金政雄).이태수(李太洙).하종오(河鍾五).이상호 (李相昊)씨등을 들수 있다.또 시집 『가자,장미여관으로』와 소설 『즐거운사라』등으로 성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파문을 일으켰던 마광수(馬光洙)씨도 77년 시『배꼽에』가 추천돼 문단에 나왔다.
소설에서는 한용환(韓龍煥)씨가 70년 1월호로 나온데 이어 같은 해 『태백산맥』『아리랑』의 대하 작가 조정래(趙廷來)씨도내보낸다.또 70,80년대 여류소설계를 신선한 의식과 감각으로수놓다 지금은 병석에 누운 이순(李筍)씨,장편 『인간시장』으로장안의 지가를 높이다 민주당 대변인으로 정치에 뛰어든 김홍신(金洪信)씨도 『현문』을 통해 등단했다.이밖에도 『현문』은 박양호(朴養浩).유홍종(柳烘鍾).김채원(金采原).정소성(鄭昭盛)씨등 28명의 작가를 70년대에 배출했다.
80년대부터 95년말까지 『현문』은 시단에 96명,소설에 40명의 신인을 내보냈다.
한편 70년이후 평단에는 김인환(金仁煥).전영태(田英泰).최동호(崔東鎬).이동하(李東夏).김선학(金善鶴)씨등 36명을 배출했다. 이렇게해서 『현문』이 창간 이래 새로 내놓은 문인은 총 5백35명.단일 문단데뷔 창구로서는 가위 압도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역량있는 신인 발굴뿐 아니라 『현문』은 다양한 사업을 펼쳐 문학의 질 향상과 저변 확대를 꾀했다.
55년 창간때부터 시.소설.평론.희곡의 각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문학상으로 현대문학상을 제정,올해까지 1백23명에게 본상을수여했다.
수상자 면면을 살피면 모두 해당 장르에서 당해연도를 대표하고있어 이 상이 한국문학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알게한다. 또 59년부터 전국순회 문학강연회를 통해 문학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했는가 하면 상설 문예창작실기교실을 운영하며 차세대 문단의 재원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문』의 문단에서의 지위는 70년대 이후 줄곧 떨어지고 있다.이것은 50,60년대 등단 문인과70년대 이후 등단 문인들의 문단에서의 역할을 비교하면 여실히드러난다.실로 70년대,특히 80년대 이후 『 현문』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은 그 숫자에 비해 빼어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문인들은 안쓰럽게도 열손가락으로 꼽기조차 부족하다.
또 발표지면으로서의 『현문』의 영향력도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한 호에 시.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문인을 30명 가량으로 칠 때 『현문』이 배출한 문인 5백여명은 1년에 한번 모지(母誌)에 발표 기회를 갖기도 힘든 상황.자연히 출신 문인들의 쌓인 원고 때문에 출신과 경향은 다르지만 출중한 작품을 발빠르게실을 수 없어 동인지적 성격으로 전락해갈 수밖에 없다.
이제 70년대 이후 수많은 문예지들이 등장,한국문학의 한 뙈기씩을 맡고 있는 문단 할거주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그리고 각각 할거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이념이나 경향의 대립.갈등은 가시고 교호주의 문단으로 가고 있다.바로 시대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문학성 높은 작품이면 범문단적으로 싣겠다는 『현문』의 창간정신으로 문단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현문』이 어떻게 공룡같은 몸집을 운신하고 문단할거를 인정하며 창간정신을 지켜낼 수 있느냐가 과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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