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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47. 빛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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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1960년 여름 ‘이 생명 다하도록’의 출판기념회 모습. 주인공 김기인(맨오른쪽) 대령과 필자(서있는 사람).

캄캄하던 벌판의 하늘 한쪽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내가 가는 길을 점점 환하게 밝혀주었다. 1960년 4월 19일. 온 천지간에 울려퍼진 함성은 빛의 소리였다.

"이젠 살았구나! 내가 또 살아났구나!"

일제시대를 마감해준 것은 일본 패망, 한반도의 운명을 갈라놓은 건 한국전쟁,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함성인가.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펑펑 울었다. 시위대의 함성은 '빛의 소리'였다.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삼한출판사가 '이 생명 다하도록'을 당장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신상옥 감독이 영화로 만들겠다고 150만환을 주었다. 무교동 호수 그릴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주인공 김기인 대령 부부를 비롯해 각계 인사들이 몰려왔다. '너는 간첩방조자야'하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광복 후 15년간 높은 벽을 쌓아 관계를 끊어버렸던 일본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본과의 '어제'를 청산하자고 나섰다. 그때 일본에서는 고미카와 준페이의 소설'인간의 조건'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복역하며 작가가 겪었던 일을 토대로 군국주의를 반성한 내용이었다. 새로 들어선 장면 정부는 뭘 하고 있는가. 8월 들어 나는 앞으로 나섰다. "내가 소화해 주마! 저 악몽과 같은 일제시대를 청산해 주마!"

KBS에서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쓰기 시작했다. 행진곡인 '군함 마치'를 듣고 청취자가 항의해왔다. 그때까지 악랄한 일본 헌병이나 고등계 형사밖에 등장하지 않던 드라마에 난데없이 웬 일본인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 들으라고 쓰는 거다!"라고 항변했다.

나는 일본과의 과거를 가슴 속에 파묻고 있을 모두에게 이것을 계기로 각자 소화해보라고 권고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인기 폭발이라고 한다. 온 나라가 들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아로운(阿魯雲)은 이창환이, 경상도 사나이 리노이에는 남성우가, 아로운을 저녁마다 때리는 모리 1등병에는 주상현이, 일본인 애인 히데코는 정은숙이 역할을 맡았다. 해설은 이혜경이 했다. 반년 동안 계속하다 보니 나는 냉철한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됐다.김기영 감독이 영화화하겠다고 달려왔다. 당시 최고 출판사인 정음사가 소설로 펴내자고 왔다. 예과 1년 후배인 최철해는 돈뭉치를 내놓았다.

"인세 선불조로 우선 100만환을 받으시오. 초판부터 1만부를 찍겠어요. 좀 급해요. 연말에 팔게 해주시오."

초판 2000부를 찍으면 괜찮다는 시대에 대단한 기백이다. 나는 당시 성북동 ICA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들 때문에 회현동 시민호텔로 나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100장을, 어떤 날은 200장을 썼다. 녹초가 돼 잠자리에 들 때는 70세 노인 안마사의 신세를 졌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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