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의문학실험>3.시인 오규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언어를 만든 것이 인간이었으므로 인간은 인간 마음대로 사물에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정하고,그리고 체계화했다.이 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도 그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인간이 만든언어를 능가하는 언어를 가진 존재가 그 어디에 도 없었기 때문이다.언어를 만든 인간은 즉시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50만년전 인류가 이 지상에 나타난 이후,그 이후의 어느 순간부터 계속되고 있는 인간의 독재로,인간이 지배하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우주는 인간이 정하는 의미대 로 이렇게도 의미했다가 저렇게도 의미하기도 했다.그러나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가 여기에시비를 걸거나 도전을 할 것인가.
이런 인간의 후예인 나도 세계를 내 마음대로 명명(命名)하고의미화하고 체계화하기를 좋아했다.아니,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내가 여전히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인데 그런 인간의 속성을 어떻게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나도 그런 지배자의 속성을 몸에 지니고 있다.명명하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가! 명명하는 것은 존재를 세계에 현실화시키는 엄청난 행위며 또한 창조주만이 행할 수 있는 절대적 행위다.그것을 내가 행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인가.극단적으로 한번 말해 본다면,만약 이 지구에 사는 인간이 50억이라면 한 사물 위에 50억개의 의미가 부과돼도 괜찮을 것인가.
그것을 언어의 다의성이라고 좋아만 해야 할 것인가.그것을 존재의 왜곡 또는 파편화,세계의 왜곡 또 는 파편화라고 읽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그렇게 계속 인간적(?)으로 세계를 요리해도 이 세계는 괜찮은 것인가.
나의 시는 지금,대체적으로 위와같은 어지러운 질문 뒤에 찾아온 언어로 돼 있다.그러니까 언어를 믿고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을 하던 시기(초기)를 거쳐 언어와 세계에 대한 불신이 내나름으로 관념과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려 던 시기(중기)를 지나,명명하고 해석하는 언어의 축인 은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서 주변축으로 돌려버린 지금의 위치에 서있는 셈이다.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도 그것을 중심축에 두고 있었고,또 인간 모두가 명명하고 해석할 때 중■축으로 사용 하고 있는 은유적 수사법이 아닌,사물을 묘사하고 서술할 때 주로 사용하고 있는 환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 옮겨두고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그 환유의 축은 함부로 명명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언어체계가 아니므로 인간중심적 사고의 횡포를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내 나름의믿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한 가지를 적어두고 싶다.
나는 언어가 의미를 떠날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다(주변축에 은유를 두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그러므로 분명히 나도 의미화를 지향하고 있다.단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명명하거나 해석해 의미가 정해져 있는 형태가 아닌 다른 것일 뿐이다.내가표현하고 싶은 것은 관념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인 「날(生)이미지」다.그 「날 이미지」는 정해져 있는 의미가 아니라활동하는 이미지일 뿐이므로 세계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왜곡하거나파편화하지 않는다.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세계의 의식」이면서또한 「세계의 언어」인 「현상」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 그런 「현상」으로 된 「현상시」를 쓰고 싶어한다.
68년『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오규원(吳圭原.55)시인은 『분명한 사건』『사랑의 감옥』『길,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등 7권의 시집을 펴냈다.吳시인은 처음부터 이미 제도처럼 굳어버린 관념과 인식의 틀을 부수고 시의 언어를 통해 자유로운 정신의 장을 열어보이고 있다.
역설이나 반어.광고문구.우화등 갖은 시적 실험을 통해 기성의의미가 덧씌워진 언어를 넘어 삶과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게 吳시인의 시세계다.
『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두들긴 그 소리는/순간 탁탁 혹은 톡톡의 우주가 된다/그 우주는 창안에 그리고 창밖에 있다』(『탁탁 혹은 톡톡』중).
기성의 관념으로 된 우주가 아니라 시인 스스로 우주를 열어보임으로써 독자를 또한 창조의 태초 공간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