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관계당국의 주선으로 성사된 서신 왕래는 레나테 할머니가 지난해 3월 첫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홍옥근씨의 첫 답장은 지난해 7월 27일 예나에 도착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할머니의 70세 생일이었다. 1963년 홍옥근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 지 44년 만이다. 이후 홍옥근씨는 지난 6월 12일까지 서너 달에 한 번꼴로 총 네 통의 편지를 레나테 할머니에게 보내왔다.
레나테 할머니는 “북한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아든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아 정신이 아득해졌다”며 “황급히 펼쳐든 편지에서 낯익은 남편의 필체를 발견하곤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응어리졌던 가슴 속의 슬픔이 터져나온 것 같다”고 감정을 털어놓았다.
홍옥근씨는 첫 답장에서 “당신과 내 두 아들을 만나 보길 간절히 원했다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 왔소”라며 독일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홍옥근씨가 보낸 편지의 발신 주소는 함경남도 함흥시 흥덕구역 흥서동 37반으로 돼 있다. 지난해 2월 독일 적십자사와 독일 외무부가 평양에서 북측으로부터 전해들은 정보대로 홍옥근씨가 은퇴 후 현재 함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이번에 우편으로 확인된 셈이다. 우편 봉투에는 70전짜리 우표가 붙어 있지만 소인이 찍혀 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정상적인 우편 배송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홍옥근씨 편지는 북한 당국을 통해 독일 관계기관에 넘겨진 뒤 다시 우편으로 레나테 할머니에게 배달되는 복잡한 경로를 거쳤다.
홍옥근씨는 편지에서 “당신 글을 받고 나서 크게 감격했었소”라며 “당신이 내 영원한 인생의 반려자가 되길 소원했었다오”라고 애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또 “당시 당(동독)이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며 당신이 우리(북한)에게 오는 것을 막았소”라며 “정치란 때론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곤 하는구료”라고 생이별 후 소식이 끊어진 이유를 해명했다.
홍옥근씨는 또 “우리의 국제적인 사랑이 고통을 가져왔구려. 나는 당신과 두 아들과의 만남을 갈망해 왔소”라며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 왔소. 두 며느리와 손주들을 보고 싶소”라며 가족 상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또 처남과 처제 등 처가 측 식구 개개인의 안부까지 묻는 자상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 당신이 두 아들을 키우느라 무척이나 애를 썼구료.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난 후 무척 기분이 좋았다오”라고 레나테 할머니를 위로한 후 “미국 때문에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소. 잘 지내고 건강하구려”라며 첫 편지를 마무리했다.
예나(독일)=유권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