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리" 심의 공륜서 보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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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심의중인 영화 『유리』(하명중영화제작소 제작.감독 양윤호)를 둘러싸고 불교계와 영화사가 팽팽한 신경전을벌이고 있는 가운데 심의 주체인 공륜이 심의를 미루고 있어 책임 회피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박상륭의 원작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각색한 『유리』는 한수도승이 파행적인 수행과정을 통해 생명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적나라한 정사장면과 살인장면이 등장한다.
공륜은 이같은 장면이 불교계의 반발을 살 소지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달 12일 불교계 대표들과 감독.제작진이 참석한 가운데 시사회를 갖고 불교계와 영화사가 심의전에 내용을 조율해줄 것을 권고했다.그러나 불교계와 영화사측은 현재 까지도 모두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조계종 총무원 문화국장 덕신(德信)스님은 『이 영화에는 비구니가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화장하고 귀걸이까지 하고 나온다』며 『말이 불교영화지 반포르노에 가깝다』고 말했다.덕신스님은 또 『영화가 부분 수정을 통해 개선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게 시사회 참석자의 공통된 의견』이라며 『공륜이 영화사와 불교계가 협의해 내용을 자체 수정할 것을요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책임 회피』라고 공륜을 비난했다.
영화사와 감독의 입장도 비슷하다.양윤호 감독은 『편집과정에서문제가 될만한 부분은 이미 다 잘랐기 때문에 더 이상 한 장면도 자를 수 없다』는 입장.영화사측은 『심의가 지연되면서 개봉은 물론 영화제 출품 신청도 못하고 있는 상태』 라며 『4월 중순까지 기다렸다가 더 이상 지연되면 행정소송등 극단적인 방법도 검토중』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공륜은 『예민한 사안이라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해보자는 뜻이었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면서도 『언젠가는 심의해야 하는데 불교계와 영화사의 의견조정이 없는 현 상태에서 당장 심의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계속 모호한 입장을취하고 있는 상태.
현재 심의기준은 심의불가라는 극단적 처방을 내릴 수 있게 돼있다.이 경우 1년간 재심의 신청이 보류되기 때문에 사실상 영화가 죽는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80년대초 제작중이던 『비구니』가 트럭운전사와 비구니의 정사장면을 문제삼은 불교계의 반발로 도중하차한 적은 있지만 완성된 국산영화가 심의불가 처분을 받은 적은 없다.공륜측도 아직까지는 『심의불가 처분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결국 내용의 부분 삭제를 통해 심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이 경 우 삭제정도에 따라 영화사와 불교계의 반발이 서로 교차될 확률이 높다.심의 결과가 어떻든 『유리』는 한차례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킬 조짐이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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