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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우리극장 작품 연극 '카스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연극이 시작될 무렵 무대 뒤에서 몹시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한남자가 등장한다.그는 마치 두 발로 제대로 설 수도,걸을 수도없는 것같다.무대 가운데로 간신히 걸어나온 그는 아주 엉터리 발음으로 무슨 말인가를 반복한다.『나는 옛날 어떤 사람처럼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무슨 소리인가.객석을 꽉 메운 긴장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뀐다.
극단 우리극장이 서울 대학로 뚜레박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카스파』(페터 한트케 작.고금석 연출).기존 연극 형식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낯선 무대로 눈길을 모으고 있다.
『관객모독』으로 유명한 독일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을 무대화한 이 작품은 언어와 인간 자의식의 함수관계를 파헤치는 언어극이란 점에서 더욱 화제.
주인공 카스파는 유산 상속의 피해자로 동굴속에 15년동안 갇혀 지내다 언어를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로 나온 인물.두 발로 직립하는 일조차 어려운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나는 옛날어떤 사람처럼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한마디 문장뿐이다.
카스파는 『언어가 모든 무질서를 질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믿는 주변의 교사들에게서 수많은 말을 배운다.언어학습에 놀라운진전을 보이는 카스파.그래서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하고 행복해졌을까. 그렇지 못했다.그는 언어를 통해 자유와 질서를 얻으리라믿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웠고 괴로웠다.마이크를 들고 연설하던 카스파는 어느 순간 자신의 말이 소음으로 변해 있음을 깨닫는다.그는 절규한다.『나는 방금 내가 뭐라 지껄였 는지 알수 없다』『모든 말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
페터 한트케는 이 작품을 쓰는데 1928년 뉘른베르크의 한 동굴에 갇힌 채 살아오다 발견된 16세의 카스파 하우저를 참고했다. 극중에서 카스파는 단지 언어를 배우기전 인간의 자연상태를 암시한다고 보면 무방할 것같다.카스파가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은 대중매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자신과 마주한다. 작품은 멀티비전 영상과 뉴스 아나운스먼트.광고 문구를 보여주고 들려주며 뉴스.광고와 정치가들의 구호에 의해 조작되는 현실을 고발하기도 한다.
작품은 당혹스럽지만 지루하지 않다.속담.격언.표어는 물론 시장의 화법,교단의 화법등 사회에서 소통되는 온갖 언어의 형태를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언어는 네가 권위에 도전하고 억압에 저항할 수 있게 한다』『언어는 네가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할 수 있게 한다』등 짧은 문장으로 강렬하게 구사되는 언어에 대한갖가지 관점도 들을 수 있다.
이미 83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연출가 고금석씨는 『이작품을 통해 의식을 획일화시키는 언어,소음화된 언어등 현대사회에서 인간을 오히려 혼란시키는 언어의 폐해를 지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745-9710.
글=이은주.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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