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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싸우는 고뇌를 너희가 아느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3호 03면

배트맨, 1939년생, DC 코믹스의 간판 스타, 일명 다크 나이트(Dark Knight).
곧 70세 생일을 맞는, 수많은 만화가에 의해 수십 차례 다시 태어난 수퍼 스타지만 설정의 주요 부분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본명은 브루스 웨인. 성경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을 합한 고담 시티(사실은 뉴욕) 최고의 재벌 후계자이며 미남 독신자.

고지식한 미국식 영웅 배트맨의 귀환

당연히 바람둥이지만 이런 행각에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수없이 많은 미국 만화 속 수퍼 히어로 중에서 배트맨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는 영웅은 아이언맨 정도밖에 없다. 그의 무기는 두뇌와 체력(무술), 그리고 웨인 그룹의 막대한 재산이 투입된 첨단 과학 장비다. 무장과 의상에서부터 자동차·모터사이클, 심지어 비행기까지 동원한다. 당연히 장난감 회사가 가장 사랑하는 수퍼 영웅은 배트맨이다.

물론 그를 규정하는 특징을 꼽을 때 내면의 어둠을 빼놓을 수 없다. 배트맨은 어린 시절 부모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그로 인해 복수의 화신이 됐다. 그의 정의 실현은 아무래도 복수의 연장선상에 있다.

초창기의 그는 어둡기보단 냉정함이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66년부터 방송됐을 때의 의상이 밝은 보라색이었던 반면 89년 팀 버튼의 극장판 ‘배트맨’ 이후에는 완전히 밤에 녹아 드는 검은색 의상이 자리를 굳혔다. 의상 색깔이 어두워진 배트맨의 성격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현재(?)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낮과 밤이 다른 정체성이다. 고담시의 시민으로서 법 질서를 무시한 자신의 정의 구현이 과연 어디까지 정당한 것인지 고민한다. 그의 역할은 범인을 잡아 사법기관에 넘기는 것.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거의 없다.

사실 이런 영웅답지 않은 성격으로 인해 한국과 미국 시장에서 그에 대한 선호도에는 꽤 큰 차이가 난다. 국민 기질과 사회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자기 편을 제지하며 “악당이라도 함부로 죽이면 안 돼!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지!”라고 외치는 순간 한국 관객들은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본다.

뒷일이야 어쨌든 ‘테이큰’이나 ‘아이언맨’처럼 화끈하게 자기 손으로 모든 걸 처리해 버리는 주인공이 한국인의 정서엔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를 상식으로 안고 사는 한국인들에게 ‘수퍼 영웅이라도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배트맨의 고지식함은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 면에서 7일 개봉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두 번째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의 한국 흥행 성적에 관심이 쏠린다. 배트맨 최고의 적수인 조커(히스 레저 분)는 이 영화에서 인간의 내면과 타락을 조종하는 절대악을 상징한다. 조커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조커는 끊임없이 정의의 수호자들에게 “너희도 나도 똑같다”며 마음을 흔든다.

당연히 배트맨도 고뇌한다. 이러니 미국에서 ‘다크 나이트’는 역대 단기 흥행 기록을 모두 허물며 약진 중이지만, 한국 관객들은 조커를 보자마자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어 버리지 않는 배트맨을 보고 더욱 울화가 치밀 수도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이 영화 속의 배트맨이 부시 대통령과 닮았다는 한 우익 작가의 칼럼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룰을 지키지 않는 테러집단과 맞서 싸우기 위해선 어느 정도 인권의 제한이 불가피하지만 그걸 무시하는 진보 진영(원문은 ‘좌경 세력’)은 ‘자유의 투사’들을 범죄자로 몰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부시가 욕을 먹는 것은 정의로운 배트맨이 오해와 모함에 시달리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어쩐지 많이 듣던 얘기라 더욱 흥미롭다.

이번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스’에 이어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다. TV 시리즈 때의 애덤 웨스트에서 시작해 마이클 키튼, 발 킬머, 조지 클루니로 이어지는 박쥐 가면의 주인이다. 외모와 연기력에서 가장 이상적인 배트맨이란 극찬을 받았지만 이번 작품의 개봉 시기와 맞물려 어머니와 누나를 구타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스타의 두 얼굴과 배트맨의 두 얼굴이 절묘하게 교차된 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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