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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5 > 변절했던 조강지처 지킨 4인방 장춘차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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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초기 장춘차오의 모습. 앞줄 왼쪽 둘째부터 야오원위안, 쉬징셴(徐景賢), 장춘차오. 김명호 제공

장춘차오(張春橋)에게는 원정(文靜)이라는 한 살 연상의 조강지처가 있었다. 본명은 리수팡(李淑芳)이었다. 학생시절 공청단에 가입했고 항일전쟁 발발 후 공산당 중앙당교를 졸업했다. 진차지(晉察冀)일보에 필명으로 투고하곤 했다. 하루는 그의 글을 읽은 당 선전부원 장춘차오의 호출을 받았다. 장은 18세때 루쉰(魯迅)과 논전을 벌인 시인 출신이었다.

단발머리를 한 앳된 모습의 리수팡이 나타났을 때 26세의 청년 장은 당황했다. 두 사람은 취미가 비슷했다. 한번 입을 열면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는 장이었지만 리와 있을 때는 듣기만 했다. 리는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1943년 12월 일본군이 팔로군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장은 피신했지만 리는 포로가 됐다. 일본군 헌병대는 낭랑한 목소리에 표준중국어를 구사하는 그를 반공선전요원으로 이용하려 했다. 리는 투항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팔로군은 총공세를 퍼부었다. 일본군은 후퇴하며 리를 내팽개쳤다. 진차지일보의 부(副)총편집이 된 장은 재회한 리에게 신문 편집을 맡겼다. 부역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이름도 원정으로 바꾸게 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원정은 정치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심사대상이 됐다. 일본군에 자수했거나 변절한 적이 있는 사람은 중용하지 않는 게 공산당의 조직원칙이었다.
장은 해방군과 함께 상하이에 진입했고 해방일보의 사장과 총편집을 겸했다. 58년에는 한 편의 글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찬사를 받았다. 원정의 과거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됐다. 중앙문혁소조 부조장이 된 장춘차오는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고 상하이의 당정(黨政)도 장악했다. 존재조차 희미하던 원정에게 보고하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원은 온갖 일에 끼어들었다. 상대방에게 손가락질해가며 말하는 습관도 생겨났다. 만나고 나오는 사람들마다 “재수없다”고 투덜댔다.

1년이 지나자 ‘원정이야말로 반역자’라는 표어가 난무했다. “원의 자료를 들고와 보고하겠다”며 죽치고 기다리는 간부가 있는가 하면 “부인을 혁명위원 후보로 추천해야 한다”며 장을 곤혹스럽게 하는 군중조직의 우두머리도 있었다.

69년 당 정치국원에 선출된 장은 원정을 공개석상에 못 나오게 했다. 한동안 조용했다. 2년 뒤 린뱌오(林彪)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장은 상하이의 린뱌오 추종세력 제거에 나섰다. 정적들은 원정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장은 원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72년 가을부터 베이징에 머물며 원정이 사는 상하이에 아예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73년 정치국 상무위에 진출한 후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상하이를 방문했다. 동행한 저우의 부인 덩잉추는 밤마다 옛 동지와 젊은 간부들의 집을 찾아가 자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왕훙원(王洪文)과 야오원위안(姚文元)의 가족을 방문했지만 지척에 있는 장의 집은 그냥 지나쳤다.

장춘차오는 식은땀이 났다.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임명하고 장을 정치위원에 임명한 뒤 다시 덩을 제1부총리, 장을 제2부총리로 결정한 무렵이었다. 아주 민감한 때였다. 전 세계의 언론이 그를 상하이 마피아의 두목으로 지목했고 장칭(江靑), 왕훙원, 야오원위안과 함께 4인방(四人幇)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지 오래였다. 장은 이혼을 결심했다. 당 중앙에 보고하고 동의를 받았다.

76년 4인방은 몰락했다. 같은 해 10월 반역죄로 체포된 장은 법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장칭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을 거쳐 1998년 출옥했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원정이 감옥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55년 전 처음 만났던 날처럼 멈칫했지만 잠시였다. 원정의 뒤를 따라갔다. 둘 사이에 정치적인 요인이 더 이상 개입될 이유가 없었다. 장춘차오는 2005년 봄 세상을 떠났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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