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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희의 SUCCESS 인상학] 울적할 땐 강에 나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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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면

▶ 강에 한 번 다녀 오세요. 기분전환에는 최고랍니다. 단, 즐기지는 마시고요. 푹 빠지면 우울증 생깁니다.

어느새 초여름 문턱, 강바람이 그리운 날씨다. 필자는 며칠 전 아들과 함께 한강으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는 혼자 온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혼자 있는 게 청승맞아 보일거라 생각했는지 씩 웃으며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꺼냈다.

"시아버지랑 남편이 속썩여 답답해서 왔어요." 얼굴을 보니 눈에 물기는 없는데도 마치 한 대 두들겨 맞은 듯 퉁퉁 부어 있고 표정도 일그러져 있었다. 인상학자가 보기엔 마음이 구겨져도 한참 구겨진 인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식 농사에는 성공한 엄마였다. 세 자녀를 뒀는데 첫째는 방송국 PD, 둘째는 은행원, 셋째는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다. 시댁 식구들도 모두 명문대를 나온 쟁쟁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바깥일을 하면서도 아흔의 시아버지, 퇴직한 남편 때문에 하루 세끼 밥을 짓는 신세였다. 시아버지는 수전노라 지금껏 자식에게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남편은 얼마 전 도박판에서 수백만원을 날렸다는 것이다.

"대개 여자가 열심히 일하면 남편은 논다는데 남편이 정년 퇴직했으면 그래도 다행 아니냐"며 달랬다. 그녀도 "하긴 그래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부어 터진 듯했던 표정이 밝아지면서 여성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이야기를 털어놨다.

큰딸의 애인이 명문 의대 출신이라 상대편 집안에서 혼수를 무리하게 요구한 탓에 3년째 결혼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큰딸이 돈 때문에 시달리다 보니 돈을 더 잘 버는 일을 찾아 나서려 한단다. 필자는 넋두리 중간에 끼어들었다.

"시아버지가 일하는 며느리라고 저축한 게 있어도 안 내놓고, 남편도 마누라 믿고 빚을 내며 살아오지 않았나. 일도 하고 밥도 차려 주려니 얼마나 속상하냐. 게다가 하는 일이 있으니 남들이 동정하지도 않는다. 돈만 쫓지 마라. 돈을 벌면 남자가 파랑새처럼 날아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정말 예쁜 여성이 됐다. 퉁퉁 부은 눈과 뺨도 차분히 가라앉아 매력적으로 바뀌었다.

"시아버님도 아흔인데 이제 얼마나 더 사시겠어요. 잘 모셔야죠."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이렇게 마음을 바꾸면 기가 바뀐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든 사정을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소를 뺄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이나 주변의 누군가에게 하소연했다면 혹 부작용을 일으켜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강물에 아픔을 흘려 버리며 감정을 순화시키고 부어있던 얼굴도 펴게 만드는 마법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필자가 말하는 인상학은 '서로 상(相)'자를 쓰는 인상학이다. 대상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대상 없이도 스스로 치유할 필요가 있다. 자연을 통해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강이란 가장 낮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길이다. 강변의 아파트는 경치가 좋아 땅값도 비싸다. 풍수로 보면 어느 정도 벌어서 돈을 쓰는 시기에 그런 곳에 자리잡아야 한다. 강물처럼 흐르는 걸 바라보면 돈을 쓰고 싶고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도로도 마찬가지다. 심한 경우 오래 바라보면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므로 매일 강물을 보는 건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다.

소녀가 바다를 좋아하면 꿈이 많지만 아줌마가 좋아하면 파란만장하다고 했다. 늘 머물지 못하고 출렁대며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기를 즐기면 인생도 그 파장을 닮게 된다. 그러나 우울한 걸 씻어내기 위해 강 앞에 마주 서 볼 필요는 있다. 답답한 속마음을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나는 행복하고 운도 좋아, 정말 살아 볼 만한 세상이야'를 되뇌어 보자.

무슨 이유에서든 마음이 불편할 때 강으로 나가보는 건 어떨까. 축축하고 어두운 마음일랑 강물에 빨아 널고 강바람에 솔솔 말려 햇살로 다림질하자. 그래야 깔끔하고 고슬고슬 매끄러운 인생이 내 것이 된다.

주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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