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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부족할 정도로 금 쌓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귀금속의 ‘메카’인 서울 종로 금은방 시장에 황혼이 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달러 약세와 더불어 금값이 치솟고 있다. 주식도 폭락하고 부동산 경기도 좋지 않다. 금을 재테크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다시 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귀금속 시장 불황의 늪은 깊어만 간다. 국내 귀금속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종로 귀금속 상가를 취재했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받은 금반지를 한강에 던져버리는 일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요즘은 선물 받은 금반지를 다시 파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재테크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반지를 처음 샀을 때보다 값이 서너 배 이상 뛰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흔적들마저 실용적 가치로 환산하는 세태를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금은 예나 지금이나 ‘돈이 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금값이 올라가는 바람에 세상은 바야흐로 황금광 시대(黃金狂 時代)가 되어버렸다. 금이라면 젖먹이 어린애까지 귀가 번쩍 뜨이는 요즘! 너나없이 속이 상하면 “에잇! 빌어먹을 금광이라도 하나 발견해야지!”하고 금광만 발견하는 날에는 세상만사 모두 풀릴 줄만 알고 덤비는 세상이다.

- 낙천성, 『당세 협잡 풍경』, 별곤곤, 1993.3.2, 『황금광 시대』,전봉관, 살림출판사에서 재인용.

황금광의 ‘광’자가 미칠 광(狂)자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 당시에도 ‘죽은 부모의 금니조차 수습할’ 만큼 금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금값이 쌀값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농부들은 낫 대신 곡괭이를 들고 금광을 찾아다녔다.

최근엔 금값이 다소 주춤하지만, 몇 년 전에 비하면 많이 비싸졌다. 달러 약세와 더불어 금의 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상황만 보면 다시 황금광 시대가 올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반대다. 동네 금은방은 눈에 띄게 줄었고, 한국 귀금속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종로 귀금속 상가의 영업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주 3일제를 해도 수입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

귀금속 시장의 불황은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데다 사회 양극화마저 심해지면서 장신구로 금을 살 수 있는 계층이 급속히 줄어든 탓이다. 요즘은 거의 철퇴를 맞은 상황이다. 3년 전인 2005년에 비해 귀금속 제조업체와 전국 도매업체, 종사자가 30~35%로 감소됐다.<표 참조>

돌잔치나 회갑, 칠순 잔치에도 금을 선물하는 예는 극히 드물어졌다. 몇 년 전 3.75g(1돈)에 5만원가량 하던 금반지는 지금 12만원이 넘는다. 잔치 때는 귀금속 대신 현금을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자연히 금은방을 찾는 손님도 줄었다.

동네에서 금은방을 찾기가 전당포를 찾는 것만큼 힘들어졌고, 종로 귀금속 상가 뒷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대로변 매장은 군데군데 손님이 있었지만, 실제 구매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IMF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귀금속 매장을 10년째 운영하는 박경식(54)씨는 “잘나갈 때에 비해 매상이 10분의 1로 줄었다”고 말했다.

“가장 경기가 안 좋다던 IMF 때도 귀금속은 장사가 잘됐어요. 낮이든 밤이든 2층에서 골목길을 내려다보면 사람 머리밖에 안 보였다고요. 근데 지금은 훤해요. 여기 돌아다녀 봤죠? 다 일찍 문 닫고 들어가요. 폐업하는 사람도 있고. 소매상이 안되니 도매상도 안되고, 또 공장도 안되고. 종로 귀금속 시장 전체가 죽는 거지요.”

귀금속은 경기에 가장 예민한 제품이다. 경기가 안 좋으면 제일 빨리 시장이 죽고, 경기가 살아나도 제일 늦게 반응이 온다. 한마디로 ‘타격은 빠르고, 회복은 더딘’ 것이다.

종로에서 장사하다 강남으로 가게를 옮기는 사람도 있다. 소득 수준이 높은 강남에 구매자가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강남 역시 고급 매장을 제외하고는 장사가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또한 외국 제품이 주를 이뤄 실제 한국 귀금속 시장은 거의 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약을 먼저 했다가, 금값이 올라 손해를 봐야 하는 일도 있어요. 반대로 금 값이 내려 일찍 계약할 걸 하고 후회하는 손님도 있고. 매일 금 시세가 달라지니 그런 일도 생기죠. 그것도 일부고, 사려는 사람이 워낙 없으니….”

서울 근교 금은방은 물론이고, 지방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가격에 인건비까지 포함해야 하니 물건 값은 더 비쌀 수밖에 없다.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되면서 금은방을 직접 찾는 사람이 줄어든 것도 동네 금은방이 어려움에 처한 한 원인이다.

종로 일대는 대로변에 위치한 귀금속 소매상이 있고, 골목 안쪽에는 소매상을 상대하는 도매상, 그 뒤로 도매상을 상대하는 귀금속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원남동 일대까지 합하면 100여 개가 넘는 공장이 있다. 여기서 전국 물량의 80%가 생산된다.

귀금속 시장이 어렵다는 것은 문을 닫는 공장이 급격히 늘어나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골목 여기저기 공장을 임대한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수퍼마켓에 담배를 사러 나온 공장 기술자 이명호(35)씨는 오래된 불황 탓인지 일거리가 없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어요. 거의 매일 그래요. 주문이 워낙 없으니까. 원래 우리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3명이었는데, 지금은 저 혼자예요. 일이 없으니 기술자들도 월급 받기 미안하고, 사장도 마냥 데리고 있을 수 없으니까 내보내는 거죠. 경기가 살아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답답하죠. 다들 먹고살기도 힘든데 금반지 사라고 누구한테 말해요. 못하지.”

타격은 빠르고 회복은 더딘 금 시장

이명호씨에 따르면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공장도 언제 폐업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이 없을 땐 그냥 출근하지 말라는 사장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공장을 내놓아도 귀금속 공장 외에 다른 사업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업종 전환도 힘들뿐더러, 요즘은 금 보관할 창고가 부족할 정도로 금이 쌓이고만 있어요. 이것도 골칫거리지. 보관하기 쉬운 물건도 아니고.”

‘나까마’라 불리는 중간상인들은 도매상과 소매상을 연결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다. 이들은 검은 파우치를 들고 골목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34년 동안 종로에서 중간상인 일을 하는 이태경(63)씨도 바쁘게 골목을 오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일이 없다고 가만 있을 수는 없잖아. 계속 돌아다니고는 있는데, 정말 일이 없어. 원래 내가 기술자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나까마를 시작했는데, 올해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 내 조카도 여기서 기술자로 일하는데, 얼굴이나 볼까 해서 찾아갔더니 오늘은 출근도 안 했더라고. 여기가 이런데 동네 금은방은 더 어렵겠지.”

일거리가 없어진 것은 금값이 상승한 탓도 있지만, 수출 시장을 중국에 빼앗긴 것도 원인이라고 한다. 한때는 중동이나 아프리카로 수출되는 귀금속이 많았지만, 지금은 중국의 값싼 인력에 밀려 수출 길이 막힌 것이다.

“근래 잘되었던 해는 88년 올림픽 때와 IMF 때야. IMF 때는 잠깐 휘청거리다가 다시 시장이 살아났어. 금 모으기 운동을 할 때는 일당을 10만원이나 주고 국가에서 일을 시켰다니까. 그 당시 기술이 좀 좋던 애들은 일본으로 가기도 했어. 워낙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니까 일본에서도 인정을 받았지. 환율 탓도 있지만, 현재는 일본 시장도 많이 죽어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애들이 많아졌어.”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모방한 짝퉁 상품을 시장에 팔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범죄의 유혹을 쉽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아는 사람이 몇 명 붙잡혀 들어갔는데, 한몫 잡는 게 벌금을 물거나, 잠깐 들어가서 사는 것보다 나으니까, 걔들이 쉽게 쉽게 하게 되는 거지.”

서울시에서는 종로 귀금속 상가 일대를 외국인 관광특구로 만들자는 상가 입주자들의 의견을 좇아 시행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이상 관광특구는 시장 활성화의 뾰족한 수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종로 귀금속 상가뿐만 아니라 그나마 영업 중인 동네 금은방들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귀금속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소득 수준이 특별히 나아지지 않는 한 금은방의 몰락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김기창 객원기자 [slow_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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