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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돌보는 보람 남자도 똑같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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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 남자 영유아 교사 박창홍.최종문.박정근.임정수.장문규씨(왼쪽부터)가 ‘사랑해요’라는 뜻의 손동작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유아교육·보육 시설에서 남자교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과연 몇명이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소수자로 지내오던 이들이 “양성평등한 유아교육을 위해 남자교사들이 꼭 필요하다”며 의기투합,‘남자영유아교사회’를 만들기로 했다. 지금까지 동참의사를 밝힌 남자교사는 40여명. 이들은 다음달 1일 창립식을 갖는다.

남자 영유아교사들이 겪는 고충과 이들의 소신은 무엇일까. 지난 11일 장문규(38·의정부 별밭어린이집 원장)·최종문(27·강남구립청마을어린이집 교사)·박창홍(26·마석 바다유치원 교사)·박정근(26·협성대 아동보육학과 4학년)·임정수(29·한국보육교사회 간사·전 종로구립은행나무어린이집 교사)씨 등 다섯 명의 전·현직 교사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임정수=여교사 일색인 교육환경은 아이들에게 '애 키우는 일은 여자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어요.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남자 일, 여자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양성평등교육을 위해 남자교사가 꼭 필요합니다.

▶장문규=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즈음이면 아빠들은 사회에서 밤낮 없이 바쁘잖아요.그런 '아빠의 공백'을 남자교사들이 메워줄 수 있지요.

*** 내달 교사 모임 만들기로

▶박창홍=유아에게 남자의 역할모델은 꼭 필요해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남자는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대변을 봐야 하는 남자아이가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아이들이 놀리기도 하고요. 그런데 남자교사가 시범을 보이면 효과 만점이지요.

▶박정근=남자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아요. 아무래도 신체 활동을 많이 해주니까요. 실습을 나가보면 애들이 서로 제 옆에 앉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해요.

▶장=남자교사가 유아교육계에 발을 내디디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편견이에요. '남자가 애 데리고 노는 건 못난 짓'이라는 유교적인 편견이요.

▶박정=고등학교 때 보육학과에 원서를 쓴다니까 선생님들이 놀림거리로 삼더라고요.

▶최종문=남자교사가 담임이라는 걸 알고 엄마들이 "기저귀 갈 줄 아세요""분유 타는 방법 아세요"라고 묻기도 해요. 물론 처음엔 잘 못하죠. 하지만 그건 초임 여교사들도 마찬가지예요.

▶박창=남자가 유아교육과나 보육학과에 진학하기도 쉽지 않아요. 아직도 모집요강에 '여자'라고 명시해 놓은 학교도 있고요. 서울시내 4년제 대학 중 유아교육학과가 있는 대학이 다섯곳인데 그 중 세곳이 여대예요. 시작부터 남자에게 좁은문이죠. 입학 후 교과 과정도 여성 중심이에요.

▶임=교사가 되기에도 걸림돌이 있어요. 성학대 등을 걱정해 딸 가진 부모들은 남자교사를 기피하기도 해요.

▶박창=졸업 후 첫 취직을 하려고 할 때 원장선생님이 "담임은 안되고 보조교사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때쯤 한 유치원에서 성추행 사건이 터졌거든요. 매일 씻기고 기저귀도 갈고 해야 하는데 남자교사는 못 믿겠다는 분위기였지요. 가슴이 답답해서 그냥 군대부터 갔다왔어요. 요즘엔 학기가 시작할 때 엄마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있어요. "안아줘도 되나요""뽀뽀해도 될까요"라고요.

▶임=친구 중 하나는 한 유치원에 채용이 결정된 뒤 부모들의 반대 때문에 취소된 적이 있었어요.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 문의했는데 수요자인 학부모들의 반대로 채용되지 못한 것은 위법이 아니라는 답만 들었대요.

▶최=부모들의 편견을 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에요. 담임을 맡은 지 1주일 정도만 지나면 엄마들이 선생님을 믿기 시작하지요. 큰아이가 졸업한 뒤 동생을 데리고 와서 담임을 부탁하는 엄마도 있었어요. 남교사에 대한 경험 부족이 편견을 심화시키는 것 같아요.

*** 여교사보다 취업 어려워

▶임=남자교사가 10%만 돼도 그런 편견들이 훨씬 줄어들텐데, 지금은 0.1%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남자교사가 어느 정도 비율에 이를 때까지는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필요해요. 병역혜택이나, 보육시설 인증제의 평가항목에 남자교사 비율을 둬서 가산점을 주든지 하는 식이요.

▶최=낮은 보수도 문제예요. 사립시설의 경우엔 월급이 100만원이 안 되는 경우도 많거든요.

▶장=보수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보육 정책이 강화돼야 해요. 출산율도 낮아지는데 정부가 계속 시설 개수만 늘려갈 게 아니고 기존 시설에 인건비 지원을 확대해야지요.

▶박창=사람들이 남자교사로서 언제 보람을 느끼느냐고 묻곤 하는데요, 남자라고 다를 거 없어요. 아이들이 잘 따르고, 부모들이 "선생님 덕분에 애가 많이 자랐다"고 감사 인사를 하면 보람을 느끼는 건 여교사들과 똑같아요. 제발 남자라서 뭐가 다르겠거니 생각 안했으면 좋겠어요.

이지영 기자<jylee@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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