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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지리기행>18.상전벽해의 東光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1995년1월1일 광양군과 동광양시는 통합돼 광양시로 다시 태어났다.그래서 지금은 동광양이란 지명이 맞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이미 상당히 익숙해진 것이기에 그대로 쓰기는 하겠다.지명을 하도 이리저리 뜯어 고치다 보니 지리학이 전공 인 나같은 사람도 행정지명을 제대로 다 알기가 쉽지 않다.전북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지명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한 예가 될지 모르겠다.
사실 동광양은 광양제철소에 의해 새로이 건설된 도시라고 해도조금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도시 자체가 제철소의 영향 아래 있는 곳이다.면적도 광양만 속 금호도 아래 바다를 매립한 곳이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상전벽해의 땅이다.그러니 제대로 얘기하자면 풍수가 나설 만한 대상은 못 되는 셈이다.다만 일찍이 풍수는 바다를 말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던지라 제철소의 입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할 것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일이 있다.얼마 전 나는 영종도 신공항에 대해 풍수적 칭찬을 한 일이 있었다.그 주된 이유가 바다였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그러고 나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비판의 소리를 들었거니 와 이제 소위 노태우(盧泰愚)씨 비자금사건이 터져 그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난 마당에도 신공항 입지를 영종도로 하는 것이 옳았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니,누군가의 대안처럼 오산 미군비행장을 신공항으로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경기도 내륙인 오산을 건드리는 것보다 바다로 나가는 것이 풍수적으로는 죄가 덜 되기에 하는 소리다.물론 근본적으로는 어떤 땅덩어리라도 훼손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게 풍수다.그러나 어차피 신공항이 꼭 필 요한 것이라면 어쩌겠는가.본 땅보다잠긴 땅을 건드리는 것이 그나마 우리의 산천을 덜 파괴하는 일이 아닐까.갯벌의 중요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말하자면이것이 현대적 생활과 풍수적 삶이 조화될 수 없는 중대한 고빗길인지도 모 른다.
이번 답사가 광양제철소의 광활한 부지를 바라보며 조국근대화의상징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나는 그런 거대한 인공구조물에서는 어머니인 땅을 탐욕적 이용의 대상으로만생각하는 사람들의 패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취 향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런 풍수를 전공하는 내 처지가 답답하기만 하다.바로그런 땅에 오기 위해 거기에서 나온 쇠로 만든 차를 타고 왔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보기를 원했던 곳은 광양제철소 북쪽의 태인도와 그 너머 진월면망덕리의 망덕산이었다.다행히 옛 모습을 꽤 많이 지니고 있어 제철소의 환경관리가 크게 소홀하지 않다는 현실을 확인한 것은 조그만 즐거움이었다.그래서인가 선소리 포구의 횟집과재첩국 전문식당은 제법 운치가 있다.간 건강에 좋다는 소문에다식당거리가 뱃머리치고는 깨끗하고 소담해 낮 손님도 많은 편이다.확실히 답사길에 먹는 일은 무척 즐겁다.다만 그 놈의 술 때문에 다음 일정을 망치지만 않는다 면 말이다.뿐인가,포구 끝에버티고 있는 무접섬(舞蝶島)은 망덕리 꽃밭 등과 마주 보는 산인데 꽃밭 등의 꽃을 보고 춤을 추는 나비 형국이니 그 모습이장해 먹는 운치를 더해줌에 있어서랴.
진월면은 섬진강과 수어천 사이에 바다 쪽으로 길게 나온 반도이고 태인도는 그 바로 밑에 위치한 섬이다.고려 우왕때 왜구가섬진강 하구를 침입했을 때 수십만마리의 두꺼비떼가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바람에 왜구들이 피해 갔다는 전설이 있 어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부르게 됐다는 이 강은 그하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기 때문에 숱한 애환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지만,이에 대해서는 훗날 따로 언급할 기회가있을 것이다.태인도는 지금은 다리 로 연결된 연륙도이지만 예전에는 물살이 만만치 않아 왕래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하지만 풍수적으로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 조화가 참으로 신기하다.진월면에 있는 망덕산은 원래 왜적의 침입을 망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산 위에 오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여러 풍경이 한눈에 보여 전망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바로 이 산에조정에 나가 천자를 받드는 형국의 명당(天子奉朝形)이 있다 하여 오게 된 것이지만 그것이 만약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 은,내 자식 출세한다는 식의 음택 명당지라면 당연히 관심이 갈 까닭이 없다.그 망덕산과 맞바라보는 태인도의 배알섬(拜謁島)과 명당등(明堂登)의 지세적 연관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가가 관심이었다.
망덕산에서 만난 김한철(75) 노인회장은 아직 천자봉조형을 찾은 사람이 없다고 한마디로 잘라 버린다.오히려 기록에는 전혀없던 망덕산 주위의 오행상생(五行相生)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관심을 끌었다.그 내용인즉 봉암재 뒷산 (신아리)이 오행의 금체(金體)요 이어서 금생수(金生水)니 진둥재(마룡리)가 수체며 수생목이니 진목(진정리)이 목체가 되고 목생화니 천왕봉(망덕리)이 화체며 끝으로 망덕산이 토체(土體)인 고로 화생토가 되어 오행상생을 완전히 이뤘다 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토생금으로 망덕산 토체가 최초의 금체인봉암재 뒷산으로 연결돼야 지극히 귀해(至貴) 천지가 숨겼다(天藏地비)가 하늘의 덕을 입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오성귀원격(五星歸垣格)이 되는 것이지만,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이기적 잡술풍수에 경도된 분은 아닌 모양이다.
지명중에는 허리띠도 있고 샘도 있으며 천자의 도장인 어인(御印)도 있다.게다가 섬진강 건너 경상도땅 하동갈사리에는 나발매기(나팔)도 있으니 이제 군사와 백성만 갖추면 모자랄 것이 없는 천자가 되는 셈이다.이 모든 풍수적 지명과 산 세는 결국 주위 지세의 조화적 고리를 상징하는 것이니만큼 어느 것 하나라도 끊어지거나 없어지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꼴이 된다.
오행이 상생하고 천자가 신하의 조아림을 받는 바로 코 아래 생긴 광양제철소가 그 천자의 신민(臣民)이 될지,반란군의 괴수와 그 수하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환경에 대한 사고방식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전서울대교수.풍수지리연구가)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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