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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정훈희, 세월도 비껴간 목소리 ‘청아한 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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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좋은 노래는 늙지 않는다.

가수 정훈희(56)의 ‘꽃밭에서’(작곡 이봉조)가 그렇다. 1990년대 중반 가수 조관우에 의해 재해석되고, 유명 뮤지컬 배우 존 카메론 미첼이 한국어로 노래하는 등 생명력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꽃길을 걷는 듯한 순수함이 느껴지는 정씨의 보컬은 ‘꽃밭에서’를 명곡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늙지 않는 노래처럼, 정씨의 보컬도 좀처럼 늙지 않는다. 낭랑하면서 청아한 그의 목소리는 세월을 비껴가는 듯하다. 그는 그 목소리로 70년대 도쿄, 칠레 국제가요제 등에서 여섯 번이나 입상하며 ‘국가대표 가수’로 불렸다.

정훈희가 데뷔 40주년 기념음반을 냈다. 여고생 시절이던 67년 ‘안개’로 데뷔했으니, 원래 지난해 40주년 앨범이 나왔어야 했다. 프로듀서를 맡았던 작곡가 이영훈씨(올 2월 타계)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8개월 정도 늦게 발매됐다. 그는 이씨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앨범에 ‘사랑이 지나가면’을 넣었다.

“지난해 가을 이영훈 특집방송 때 펑펑 울었는데,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요. 내가 방정을 떨어서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고….”

앨범은 78년 ‘꽃밭에서’ 이후 30년 만의 독집 앨범이다. 13곡 중 8곡이 신곡이다.

“애 키우고 남편(가수 김태화) 뒷바라지하느라 활동을 접었던 때도 있었죠. 그러다 89년 남편과 듀엣곡 ‘우리는 하나’를 냈어요. 옛 노래들만 불러도 먹고살 수 있지만 그러기는 싫었어요. 그래서 후배 가수들의 앨범에 피처링도 해주고, 드라마 OST도 불렀죠.”

대한가수협회 수석부회장인 그는 아들뻘 되는 후배 가수들에게 ‘쿨’한 선배로 통한다. “가요계의 세대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선배들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이번 앨범의 ‘마이 뮤직’(My music)은 여성그룹 버블 시스터즈가, ‘그 사람 바보야’는 힙합그룹 45rpm이 피처링해줬다. 윤도현의 프로듀서 김신일, 부활의 김태원, 김현철·김형준·윤명선 등 후배 작곡가들도 대거 참여했다. 가장 주목을 끄는 노래는 ‘노 러브’(No love). 후배가수 인순이와 함께 부른 듀엣곡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디바가 함께 노래했다는 이유만으로 녹음 전부터 화제가 됐다. 솔·블루스·펑크에 기반한 편곡과 프로듀싱은 두 디바의 각기 다른 매력의 음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이왕 인순이와 하는데 템포가 빠르고 트렌디한 노래를 선보이고 싶었어요. 사랑에 배신당한 여자들이 ‘사랑, 남자 없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노래예요. 오해는 마세요. 인순이나 저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으니.” (웃음)

타이틀곡 ‘삐삐코로랄라(새소리)’는 경쾌한 멜로디와 쉬운 가사가 인상적이다.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밝은 노래로 희망을 주고 싶었다”는 게 타이틀곡 선정 이유다.

그의 대표곡 ‘꽃밭에서’ ‘그 사람 바보야’ ‘안개’도 새로 편곡했다. 반면 ‘무인도’는 오리지널 버전으로 수록했다.  

“복제할 수 없는, 장중하고 독특한 느낌 때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꽃밭에서’는 17세 여고생 정훈희를 발굴해 스타 가수로 키워낸 작곡가 이봉조씨의 유작이다. 정씨 본인도 무척 아끼는 노래다.

“계속 어려운 노래만 만드시기에 ‘초기의 깨끗하고 심플한 느낌의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더니, 이 노래를 만들어주셨죠. ‘훈희에게만 준다’며 아껴두셨던 노래예요.”

정훈희에게 음악은 가족 그 자체다. 일제강점기 앨범을 냈던 아버지(정근수)와 그룹 히식스 보컬이었던 넷째 오빠에게 음악을 배웠다. 또 가수와 결혼해, 가수를 지망하는 두 아들을 뒀다. 이번 앨범의 ‘러브 이즈’(Love is)는 장남 김대한이 ‘에릭’이란 이름으로 피처링해줬다.

“아버지는 어린 제게 손으로 방바닥을 두들기면서, ‘하나~둘~’ 리듬을 정확하게 유지하는 연습을 시키셨어요. 그때는 그걸 왜 하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귀중한 자산이 됐죠. 어떤 노래를 해도 리듬을 기막히게 잘 맞추는 가수로 통했으니까요. 조카 가수 제이의 아버지인 넷째 오빠(정희택)는 내가 주워들은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며, 악보를 그려줬어요. 살아있는 교육이었죠.”

블루스 스타일로 편곡한 ‘안개’의 후렴 부분은 오리지널 곡에서 따온 것이지만, 새로 녹음한 그의 목소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그는 40년간 변함없는 목소리와 창법을 유지해 왔지만, 스스로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슬픈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윤상이 만들어 준 ‘소월에게 묻기를’(2002년)을 듣더니, 오빠들이 그러더군요. ‘이제야 훈희가 노래를 좀 하는구나’라고. 여자로서의 꿈은 오드리 헵번처럼 주름살이 예쁘게 늙는 겁니다.”

이번 앨범의 표지 그림도 ‘오드리 헵번의 회상’ 시리즈로 유명한 류은자 화백이 그린 정씨의 초상화다.

◇ 정훈희가 걸어온 길

- 1967년 ‘안개’로 데뷔

- 70년 ‘안개’로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 ‘베스트10’ ‘가수상’ 동시 수상

- 72년 ‘너’로 아테네 국제가요제 ‘장려상’ ‘인기상’ 동시 수상

- ‘좋아서 만났지요’로 도쿄 국제가요제 ‘특별가수상’ 수상

- 75년 ‘무인도’로 칠레 국제가요제 ‘3위상’ ‘인기가수상’ 동시 수상

- 79년 ‘꽃밭에서’로 칠레 국제가요제 ‘3위상’ 수상

- 89년 남편 김태화와 ‘우리는 하나’ 프로젝트 음반 발표

- 94년 이봉조 추모앨범 발표

- 2002년 드라마 ‘야인시대’ OST 참여

- 2005년 드라마 ‘불량주부’ OST 참여

- 2006~2007년 프로젝트 음반 ‘옛사랑’ 참여

- 2008년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발표


글= 정현목 기자, 사진= 정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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