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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동안 달리다 울창한 숲길로 들어섰다.도쿄 교외의 공원이었다. 공원 끝에 연못이 있고,짙푸른 그 연못을 내려다보는 자리에2층 목조집이 솟아 있었다.칠하지 않은 생목재로 지어진 그 집은 정갈은 하되 어쩐지 으스스해 보였다.
나무대문에 자그마하게 태극(太極)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한국의 태극기 무늬군요!』 스티븐슨 교수가 반가운듯이 아리영에게 말했다.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점을 친다는 뜻일까요?』 이자벨이 제나름으로 추측했으나 아리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종잡을 수는 없어도 강한 예감 같은 것이었다.
배슷이 열린 대문에서 현관까지 하얀 바둑알처럼 고운 자갈이 깔려 있고,그 뜨락길 양쪽에 두 그루의 나무가 서있다.암수의 비자(榧子)나무였다.제주도 비자림에서 본 8백년 묵은 거목 생각이 났다.
「비자」의 일본말은 「가야(かや)」라고 나선생은 그때 가르쳐주었다. 비자는 「신목(神木)」으로 치는 향기롭고 지체 높은 나무다.우리의 성황당 같은 일본의 신사(神社) 뜰에도 흔히 비자나무를 심는다.비자는 혹시 가야(伽倻)사람들과 더불어 일본에간 수종(樹種)은 아닐까.그래서 나무이름도 「가야」라 한 것은아닌지.일본 신화 중에는 한국의 나무씨를 왜땅으로 가져가 뿌린신들의 얘기가 실려 있다-나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하얀 가운 같은 웃저고리에 다홍 주름치마를 받쳐 입은 소녀가신당으로 안내해 준다.한쪽 벽 가득히 하늘을 나는 용 그림이 그려져 있고,그 앞에 경상(經床)이 놓여 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들어왔다.새하얀 명주 옷차림의 여인은 경상 앞에 나붓이 앉았다.한쪽 무릎을 세운 한국식 앉음새가 아리영을 놀라게 했다.하기야 일본 박물관 같은 데서 본 역대 왜왕의 왕비등 귀부인 목상(木像)도 모두 한쪽 무릎을 세우는 한국 여인의 앉음새를 하고 있었다.
고운 노(老)부인이었다.스티븐슨 교수에 의하면 일흔살쯤이라지만 그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반짝이는 검은 눈이 사람을 쏘듯,빨아들이듯했다.어디서 본듯한 눈매였으나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앉자마자 붓을 들고 화선지에 글씨를 휘날려 써서 다홍치마 소녀에게 넘겼다.아리영에게 갖다 주라는 것이다.
잉태(孕胎) 여식(女息) 이별(離別) 인욕(忍辱) 합환(合歡)….열자의 한자가 쓰여 있었다.이것이 아리영의 신수라는 것인가.그러나 굳이 아리영이 아니라도 여자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글마디로 여겨졌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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