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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기행>"백인의 심장" 준 구드윈.벤 쉬프 共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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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90년2월2일은 흑백을 막론하고 모든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이날 데 클레르크 남아공대통령은의회에서 집권 국민당이 40여년간 실시해온 아파르트 헤이트 정책 포기를 선언했다.2년뒤인 92년3월에는 흑인 참정권과 차후정치일정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다시 2년뒤인 94년4월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최초의 선거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돼 부통령이 된 데 클레르크와 함께 흑백 연합정부를 이끌기 시작했다.99년까 지 새 헌법을 마련해 다시선거를 치르면 완전한 흑인중심의 정치체제가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4천5백만 남아프리카 인구의 75%가 흑인 반투족이다.백인과흑백혼혈은 각각 10% 정도다.백인중 영어사용자는 40%가량이고 아프리카너(Afrikaner),즉 아프리칸스(Afrikaans)사용자가 60% 정도인데 이 아프리카너가 바로 아파르트 헤이트 정책의 주체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그 시대착오적인 잔인성으로 널리 알려져있다.이 시대착오성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70년대 후반에 아프리카에 주재한 일이 있는 언론인 준 구드윈과 오벌린대 정치학교수 벤 쉬프는 아프리카너 1백여명에 대한 인터 뷰를 통해 아파르트 헤이트의 뿌리를 남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속에서 찾았다.
그 결과를 담은 책이 『백인의 심장』(원제:The Heart of Whiteness,Scribner간행)이다.
60년대부터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무릅쓰고 세계를 경악시킨 76년 소웨토 사태 같은 학살을 거침없이 자행하면서 그토록 냉혹한 인종차별정책을 최근까지 지켜온 사람들,아프리카너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기에 그와 같은 증오의 시장을 만들고 ,키우고,그안에서 살아올 수 있었을까.저자들은 그 증오의 논리가 세워진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가해자의 마음속에 깃들여인간성을 마비시켜온 두려움을 파헤쳐 보여준다.세계의 반대편 끝,실정도 모르는 채 비난만 해온 일 을 바로 우리의 일처럼,우리 이웃의 일처럼 느끼게 만들어주는 한 권의 책이다.
포르투갈인이 희망봉 항해를 시작한 것은 1480년대의 일이었지만 유럽인이 아프리카 남단에 처음 정착한 것은 1652년이었다.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배경으로 상륙한 일단의 네덜란드인이었다.그후의 이민도 네덜란드인을 주축으로 이뤄졌다.
1806년 영국이 이 지역 통치권을 획득하면서 새로운 문제의씨앗이 뿌려졌다.토착화된 백인들은 유럽과 상당히 다른 문화를 키워내고 있었다.언어조차 자기네 고유의 아프리칸스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아프리칸스는 네덜란드어를 기본으로 독 일어와 프랑스어 요소들이 가미된 것인데 호이족.산족 등 케이프지역 토착흑인의 언어에서도 채용한 것이 많다고 한다.대부분 문맹이었던 이민사회에서 수백년에 걸쳐 현지생활에 적합한 형태의 구어(口語)를빚어낸 것이 아프리칸스다.
현지어를 만들어 쓰며 자신의 정체성을 현지에 뿌리박고 있던 토착백인들은 영국계 신참자들에게 이질감을 가졌다.상공업과 행정에 종사하는 영국인을 식민지배자로,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는 자신을 피지배자로 파악했다.두개의 큰사건,1830년대 후반의 「대이동(The Great Trek)」과 1899~1902년의 보어전쟁을 통해 이런 자의식이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로 발전돼 나왔다.1830년대 들어 케이프지역에 영국의 지배가 강화됨에 따라많은 토착백인들이 동북쪽으로 오렌지 강과 발강 건너의 반투족 밀집지역으로 진출했다.지금의 오렌지주와 트란스발주 지역에 자리잡은 이주민들은 내륙지방에 별 관심이 없는 영국 식민당국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얻었다.그러나 1860년대 이래 다이아몬드와 금이 연이어 이 지역 에서 발견되자 사정이 달라졌다.영국계이민이 대폭 늘어나고 영국 당국은 전지역의 직접통치를 원하게 됐다.그 결과 일어난 보어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다른 곳의 침략전쟁과 다른 점이라면 피침략자가 애초의원주민이 아니라 앞서 진출했던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참혹한 패전 속에 빚어진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는 당연히 제국주의 영국과의 대비속에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아프리카 토착 부족중 하나,흰 피부를 가진 부족으로 자신을 본 것이다.그러면서타락한 동시대 유럽인보다 자기네가 유럽 문명과 기독교의 진정한계승자임을 자부했다.아프리카 문학과 아프리카너 문화의 진흥을 통해 유럽인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한편 흑인들에게는 문명을 갖지 못한 존재라는 이유로 현지인 자격을 부인하는 이중성이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본질이 되었다.보 어전쟁의 결과 만들어진 남아프리카연방 속에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는 꾸준히 세력을 키워 1948년 국민당 집권에 이르렀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국민당 기본정책으로 인종차별의 참상을 끊임없이 빚어내는 동안 아프리카너의 양심은 마비돼 있었다.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아파르트헤이트가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그들은 믿었다.「건전한」아파르트헤이트는 자신들뿐 아니라 흑인들 에게도 좋은것이 될수 있다고 믿었다.불거져 나오는 잘못된 일들은 시행상 착오일 뿐이며 아파르트헤이트의 본질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그렇게 40여년을 믿고 지낸 것이다.이제 아파르트헤이트를 반성하는 아프리카너들은 자기네 「욕심 」때문이 아니라「두려움」때문에 그런 잘못을 저질러온 것으로 이해받고자 한다.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욕심으로 지은 죄는 증오의 표적이지만,두려움으로 지은 죄는 연민의 대상이다.욕심과 두려움의 경계를 분명히 잘라 말하기 어 려운 것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죄악성이다.그러나 가해자인 아프리카너 역시 역사의 희생자임을 이해한다면 남아프리카의 비극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김기협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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