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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싸우며 만든 미국의 영혼 -‘버번 위스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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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07면

007 제임스 본드가 새로 부임한 상관 ‘M’에게 불려간다. M은 전임자들과 달리 여자다. 007과 M 사이에 언쟁이 있은 뒤 M이 분위기를 바꾸자는 취지로 말한다. “술 한잔 하겠나?” 007이 말한다. “전임자께선 코냑을 즐겨 드셨습니다.”

임범의 시네 알코올

새로 온 상관 앞에서 부하 직원이 전임자의 취향을 얘기하는 건 일종의 ‘개김’이다. M은 단호하게 말한다. “난 버번이 더 좋아.” 둘 사이의 긴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결국 007은 M에게서 ‘호전적’이고 ‘여성차별주의자’라는 핀잔까지 듣는다. 그래도 M은 상관답다. 미션을 부여받고 일어서는 007에게 짧게 한마디하는 걸 잊지 않는다. “살아 돌아오게.”

이 장면을 술에 주목하고 리플레이. 코냑은 프랑스를, 버번은 미국을 대표하는 독주(spirit)이다(spirit에 ‘영혼’이라는 뜻도 있으니 좀 과장하면 두 술은 각각 프랑스와 미국의 영혼인 셈이다). 코냑은 과일주를 증류한 브랜디 가운데 가장 명성이 높고, 버번은 곡주를 증류한 위스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미국이 자체 개발한 몇 안 되는 술로 최근에 세계적인 소비량도 늘고 있다.

코냑·버번 모두 두 나라의 지명으로, 술에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두 나라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007 시리즈에 나오는 M은 영국 정보국 MI6의 수장을 칭하는 암호다. 영국 정보국에 코냑을 좋아하던 수장은 가고 버번을 좋아하는 수장이 왔다?

앞에 인용한 영화는 1995년에 나온 ‘007 골든아이’다. 90년대 중반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서구의 역학관계가 미국 대 소련에서 미국 대 유럽연합(EU)으로 옮겨가던 때다. 93년 출범한 EU는 회원국 수를 늘리고 통합의 강도도 높여 갔고, 프랑스는 그 중심에 있었다. 영국은 EU 회원국이면서도 EU 못지않게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몰두하는 어정쩡한 입장에 있었다.

그때 새로 부임한 영국 정보국장이 “난 버번이 더 좋아”라고 말한다. ‘우리의 노선은 미국’이라는 영화의 선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쯤에서 술 얘기를 하자. 버번 위스키는 원료인 곡물 가운데 통상 70% 이상(미국 정부 법으로는 51% 이상)을 옥수수로 하여 만든 주정을 증류한 것이다.

미국 법은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서 2년 이상 숙성시켜야 ‘버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한다(스카치 위스키에 대해 영국법이 요구하는 숙성 기간은 3년 이상이다). 스카치 위스키에 비해 싸구려 술로 통해 오다가 이후 6년 이상 숙성된 버번이 대량 생산되면서 통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 버번은 18세기 후반 미국에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사에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갈등이 얽혀 있다. 미국 서부 개척기 초기, 넓디넓은 땅에 옥수수가 무척 잘 자라 사람 먹고, 소와 말 먹이고도 남았다. 이걸 미국 동부에 가져다 팔자니 운송비도 안 나오고, 그래서 술로 담가 마시기도 하고 다른 물자와 교환하는 화폐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마침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 1812년 전쟁 등을 하는 동안 설탕과 당밀 등의 수입이 힘들어졌다. 그때까지 미국에서 주로 마시던 독주는 럼주였는데, 사탕수수가 원료인 럼 역시 원활히 생산되지 못했다. 그래서 옥수수술을 증류한 버번 위스키가 그 대체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버번의 역사에 영국이 등장하는 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부터 그렇다. 버번 위스키는 켄터키주 버번 지방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버번(Bourbon)’이라는 지명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할 때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미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위스키’의 표기도 미국과 영국이 다르다. 스카치는 ‘whisky’이고 버번은 ‘whiskey’이다).

또 하나. 독립전쟁으로 빚에 쪼들리게 된 미국 연방정부가 1791년 ‘위스키 세금’을 매기자 주류 제조업자들이 ‘위스키 반란’까지 일으켰다가 결국 연방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켄터키주로 옮겨갔고 마침내 그곳에서 훗날(64년) 미국 의회가 ‘America’s Native Spirit’으로 공인한 버번 위스키가 탄생했다. 말하자면 버번은 미국이 (007의 모국인) 영국과 싸우면서 만들어낸 ‘미국 고유의 영혼’이다.

‘007 골든아이’는 72년 ‘007 닥터 노’ 이후로 앨버트 브로콜리가 제작한 17번째 007 영화다. 직전의 007 영화 ‘살인면허(89년)’까지는 1년 반에 한 편꼴로 제작돼 온 데 반해 이 영화는 6년 만에 나왔다. 베를린 장벽 붕괴, 소비에트연방 해체 등은 냉전 체제를 기반으로 탄생한 007 시리즈 이야기 틀의 재정립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골든아이’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 소설을 기초로 하지 않은 첫 번째 007 영화이기도 하다.

영국 첩보원 007이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이 시리즈는 ‘영국이 세계를 지킨다’는 ‘판 브리태니카’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역사는 누가 봐도 분명하게 미국 주도로 흘러갔다. 그래도 냉전시대엔 같은 자본주의 국가로서 영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면이 클 수 있었겠지만 90년대부턴 달라졌다. 미국의 적이 곧 영국의 적이라고 말하기 힘들어졌는데 이제 어쩔까. ‘버번이 더 좋아’라는 M의 말은 술에 빗대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그 답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 007은 누구랑 싸울까. 피어스 브로스넌이 007로 처음 출연한 ‘골든아이’에서 그는 소련이 아니라, ‘야누스’라는 무기밀매 집단과 싸운다. 물론 이전의 데탕트 시기에 007은 소련 첩보원과 함께 세계 평화를 해치려는 제3의 세력과 싸운 적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달라졌다. ‘야누스’는 걸프전 때 미국과 싸우던 이라크를 지원했다. 99년 나온 ‘007 언리미티드’에서 007이 맞서 싸우는 국제 테러리스트의 활동 무대엔 아프간·이라크·이란·평양 등 미국의 적성국가가 망라돼 있다. 2002년 ‘007 어나더데이’에서 007의 적은 북한군이었다.

“난 버번이 더 좋아”라는 말은, 유머치고는 좀 섬뜩했다(원래 007 영화를 대표하는 술은 M이 마시는 코냑이나 버번이 아니라 제임스 본드가 마시는 마티니다. 007 영화는 마티니 제조법을 바꿔 놓기까지 했다.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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