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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적도 태평양에 길게 드리운 문명화의 해악·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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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사뭇 가까워졌다. 이제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는 말이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평범하게 들리는 그런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적도지방은 아직 낯설기만 하다. 그만큼 우리와 소통이 자연스럽지 못한 탓일 게다. 그래서 어쩌다 적도 운운하는 책을 만나면 호기심부터 일게 마련이다. 대부분이 이색풍물을 소개하는 기행문 따위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도 우선 그런 면에서 일단 눈길을 끈다. 언뜻 보면 기행에세이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금세 가벼운 터치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책은 한마디로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풍물 등을 포괄해 다루는 민족지(ethnography), 그 중에서도 해양민족지(maritime ethnography)이다. 폴리네시아 하와이 제도로부터 마샬제도를 거쳐 미크로네시아제도에 이르기까지 적도 태평양 군도의 다채로운 역사와 문화가 지난 세기 한반도의 경험과 어떤 인연으로 연결돼 있는지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적도 태평양에 드리웠던 ‘문명화’의 해악과 그늘을 다루면서 근대화 와중에 침묵 당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삶과 기억, 나아가 그들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들을 탈식민주의 시선으로 재발견한다. 그는 이 같은 작업을 위해 우선 ‘태평양은 정말 태평할까’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그리곤 ‘전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만들어진 제국의 작품’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에서부터 결론을 끌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적도 태평양이라는 풍경에 각인된 복잡하고 섬세한 맥락들에 관해, 즉 ‘만들어진 태평양’에 관해 분석하고, 추적하고, 고증을 들이댄다. 이를 위해 고고학·역사학·지리학·종교학·신화학·민족학·민속학·인류학·의학·식물학·동물학 등 그야말로 전 방위로 박물학적 지식과 정보가 동원되고 있다.

저자는 이미 이 같은 방식의 저술에 익숙하다. 수년 전 나온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도 다루는 대상 영역이 동아시아 바다라는 점만 다를 뿐 추구하는 점이나 접근 양식이 같다. 말하자면 이번에 나온 『적도의 침묵』에서 관심영역을 더 확장한 것뿐이다.

여기서 혹자는 웬 뜬금없이 적도냐고 궁금해 할 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곳이 바로 수많은 한인들이 징용· 징병으로 끌려갔던 남양군도”라며 “우리 역사와 무관한 곳이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같은 연관성을 바탕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앞으로 이들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이전 저작들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도 철저히 ‘현장, 바로 그곳’에 기초해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와이 호놀룰루 시내 주청사 앞에 있는 다미엔(Damien)신부의 동상을 보고 20세기 초 한센병과 관련된 제국주의의 비인권적 처사(일제 때 세워진 소록도 수용소를 생각해보라)를 얘기하는 것 같은 방식이다. 그것은 저자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학문태도이자 신념이다.

이 책의 저술을 위해 저자는 2007년 해양연구원 탐사선인 온누리호에 승선해 현지를 답사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적도 태평양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제국주의 시각에서 쓰인 것임을 확인하고 이 같은 시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진실에 보다 접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왜 태평양의 원주민 아이들이 자신의 노래 대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배워야 하는가. 정작 이 친구들에게 필요한 건 바닷가에서 발휘할 고기잡이 기술일 수도 있다. 왜 그네들의 민속지식은 무시되고 유럽지식만 선진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되는가. 또 우리는 이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책은 ▶전복(顚覆)▶침묵▶수평▶수직 등 크게 4부로 구성돼 있다. 이는 각 지역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잡은 제목으로 1부 전복 편은 폴리네시아 하와이 민족지이고, 2부 침묵 편은 적도 태평양 상의 배에서 쓴 해양문명의 조건 등에 관한 기록이다. 3부 수평 편은 미크로네시아 캐롤라인제도 축섬의 민족지, 4부 수직 편은 미크로네시아 캐롤라인 폰페이섬의 민족지이다. 각 부마다 예리한 분석과 비평도 그렇지만 풍부한 관련 도판과 함께 펼쳐지는 다양한 정보의 제공은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마치 기행문처럼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다. 하와이하면 으레 떠올리는 훌라춤이 즐거움과 경외, 노래, 기도, 한탄, 신에 대한 찬미, 남자와 여자 등에 대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원주민 사회의 통합기제에서 한낱 관광용으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선교사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횡포에 화가 나기도 하고, 한인이민사를 구조적으로 해체해 원인과 과정을 드러내 보일 때엔 “아하 그랬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해양문명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박람강기가 돋보인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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