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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 시시각각

남과 북의 먹는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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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영화 ‘크로싱’을 봤다. 손수건 없이 볼 수 없는 슬픈 영화였다. 출연진의 이름을 소개하는 엔딩신이 스크린 아래로 다 흘러내릴 때까지 관객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숙연한 분위기였다.

‘크로싱’은 탈북자의 가족 해체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인 용수는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넘는다. 중국 공안에 쫓기는 신세가 된 용수는 인터뷰만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베이징 주재 독일대사관의 담을 넘고, 뜻하지 않게 한국에 오게 된다. 용수는 브로커를 통해 아내와 아들의 한국행을 도모하지만 그 사이 아내는 숨을 거둔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아들은 몽골 국경을 넘던 중 사막 한가운데서 죽는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만 1만3000명이다. 한 명 한 명이 영화 같고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구체적 사연이야 다 다르겠지만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극도의 식량난으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영화 속 용수 가족의 비극도 먹는 문제 때문이었다. 제대로 먹을 수만 있었다면 아내는 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고, 용수가 국경을 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산에서 나물을 캐고 장작을 주워 모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어떤 날은 50원을 벌기도 했지만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이 돌아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따금 허기가 져 머리가 핑 돌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습니다. 풀과 장작을 구해 죽을 끓여 먹자…. 그런데 나흘을 굶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고,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배가 고파 공부를 할 수도,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고, 오로지 머릿속에는 먹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가 2005년 펴낸 탈북자 증언록인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 소개된 김태금(24·여·가명)씨의 이야기다. 탄광 간부가 키우라고 맡긴 돼지를 배가 고파 잡아먹은 죄로 이모와 이모부가 공개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영화보다 더한 것이 현실이다.

두 달 이상 끌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파문의 발단은 먹거리의 안전 문제였다.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그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른 북한에서 먹거리는 처절한 생존 문제다. 음식물쓰레기만 줄여도 한 해 수조원의 돈을 절약할 수 있고, 그 돈이면 북한 주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는데 광우병 걱정이나 하고 있는 것이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이 50만t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키로 하자 뒤늦게 정부는 북한에 식량을 주지 못해 안달이다. 1차분 3만7000t의 밀가루를 실은 미 선박 볼티모어호가 남포항에 입항해 하역 작업에 들어간 날, 정부는 우리가 제안한 5만t의 옥수수 지원을 북한이 공식 거절했다고 공개했다. 시간과 장소만 정해주면 무조건 실어다 주겠다는 말도 했다. 북한이 먼저 손을 내밀기 전에는 줄 수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제발 받아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퍼주기’가 아닌가.

 북한 식량난의 근본적 책임은 물론 김정일 체제에 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옥수수를 받아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에게 나눠주는 것이 도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산 식량이 대규모로 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뭐 하러 머리 숙여 가며 남한 식량을 받겠는가. 우리라면 받겠는가.

굶주리는 사람 앞에서 먹을 것을 갖고 장난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진정으로 북한 주민을 도울 생각이 있다면 더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다. 세계식량계획(WFP)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보내면 그만이다. 촛불도 마찬가지다. 촛불을 계속 들겠다면 컵 속에 쌀이라도 한 움큼씩 채워 나오는 것이 양심에 맞는 일 아닌가. 그걸 모아 촛불의 이름으로 북한에 보내란 말이다. “왜 예수는 남한에만 있느냐”는 용수의 절규가 언제까지 이 땅에서 계속되어야 하는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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