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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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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다. 되는 집안은 근심 없고 건강하며 화목한 게 다들 비슷하지만, 안 되는 집구석은 문제가 애정이든 금전이든 자녀든 천차만별의 이유로 불행해진다는 얘기다. 진화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정의를 좀 더 진화시킨다. “흔히 성공의 이유를 한 가지 요소에서 찾으려 하지만 실제 어떤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수많은 실패 원인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른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자면 이 정권은 애초부터 될성부른 집구석이 아니었다. 장기라고 내세운 게 오로지 경제 살리기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윤을 남기는 게 유일한 목표인 기업이라면 모를까 배부른 사람, 배고픈 사람, 게다가 배 아픈 사람까지 만족시켜야 하는 국가경영에는 돈벌이 말고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나 많은 거다. 그야말로 헛디디면 치명적인 천 길 낭떠러지가 계속되는 첩첩산중인 거다.

게다가 단단한 오해까지 했다. 온갖 약점에도 경제 구호 하나로 500만 표차로 이기고 나니 다른 건 다 못해도 돈만 벌어주면 그만일 걸로 착각한 거다. 그러다 강부자·고소영 인사가 나오고 ‘만사형통(萬事兄通)’ 공천이 나와 스스로 올가미를 옭아맨 거다. 물론 불운한 측면도 있고 억울할 이유도 있겠다. 지난 정권이 허송한 세계 경제 호황이 침체로 반전되고 유가와 각종 원자재값이 폭등하는 악조건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불운이 있고, 그럼에도 한번 경제를 살려보겠노라고 새벽 별 보기 운동을 시작한 차에 전 정권 작품인 미국산 쇠고기의 덫에 덜컥 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는 과목이 경제더라도 낙제 위험이 겹겹인 만큼 우선 정치부터 단단히 챙겨뒀어야 옳았다. 외고 입시에서 오히려 수학 성적이 당락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다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기술이 정치다. 경제가 돈을 버는 일이라면 정치는 그것을 배분하는 일인 까닭이다. 실용적 선택도 좋지만 정치적 고려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대통령은 CEO 시절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걸 수없이 봤을 터다. 내버려두면 지름길로 갈 수 있는데 자꾸 돌아가라고 딴죽 거는 정치가 미웠을 터다. 그래서 생긴 정치혐오증이 자신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다.

사회학자 레몽 아롱의 말처럼 “정치적 선택은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중의 선택”인 거다. 당연히 선을 선택해야겠지만 사람들이 싫어하면 별수 없는 거다. 우선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놓고 이해와 설득으로 한발 한발 선에 다가가는 거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 배부른 사람 배 아픈 사람을 차근차근 만족시켜 나가는 게 정치고, 그것이 정치인 이명박이 해야 할 일인 거다. 민주주의란 그렇게 비효율적인 고비용 구조지만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안 늦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야당을 의회로 불러들이는 거다. 가출한 철부지들처럼 갈 곳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야당 의원들을 윽박지르기만 할 게 아니라 손에 쥐여줄 사탕을 찾아야 한다. 여야 막후 협상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래서 서둘러 국회를 열고 그곳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시작해 나가야 한다. 소수 야당이지만 더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려면 그들의 힘이 필요한 거다.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래서 근로자들은 산업현장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 할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수많은 실패 원인을 피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대통령의 주특기인 경제 살리기를 실천할 수 있는 굳은 토양을 만드는 길이다. 비스마르크가 말했듯 “정치란 많은 교수들의 생각처럼 과학이 아니라 예술”인 것이다. 교수 좋아하는 대통령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이훈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