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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잠자는 극장전산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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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이후남 문화부 기자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각각 지난 2월 19일과 3월 14일 관객수 1000만명을 넘어 한국 영화사를 새로 썼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영화 배급사들의 자체 집계에 따른 것이다. 공신력 있는 외부기관의 조사가 아니므로 부풀려졌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어렵다.

실제로 영화계에서는 나란히 개봉한 영화끼리 첫 주말 성적이 서로 1등이라고 우기는 시비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극장과 흥행수입을 나눠야 하는 배급사.제작사에서는 표가 얼마나 팔렸나 확인하려고 따로 돈을 들여 극장에 입회인을 보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의 각국 흥행순위표에서 한국은 빠져 있다. 수치를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후진적 상황을 개선하자는 논의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8년여의 논란 끝에 올 1월 1일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의 극장통합전산망이 그 성과물이다. 인터넷 발매서비스업자들과 극장의 전산망을 연결해 매표 실적을 실시간 데이터로 취합하는 이 사업은 그러나 출범 100일도 못 돼 벽에 부닥쳤다. 지난 7일 전국 스크린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서울시극장협회가 데이터를 실시간이 아닌 영화상영 종영 후 통보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영진위 집계는 연말 영화연감에나 실릴까 말까다.

협회 측은 영화별.상영관별로 발권시점.상영회차별 자료까지 실시간으로 전송하라는 것은 '민간기업 경영정보에 대한 지나친 공개요구'라는 입장이다. 협회 관계자는 "통계가 목적이라면 꼭 실시간 데이터일 필요가 어디 있느냐"면서 "극장을 세금포탈이나 하려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보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영진위 관계자는 "유통을 합리화한다면서 실시간 정보를 꺼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현재까지 통합전산망에 가입한 곳은 인터넷 매표가 가능한 전체 스크린(957개)의 25.8%. 대형 멀티플렉스인 CGV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관객 1000만시대'의 이면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주먹구구식 통계가 숨어 있다.

이후남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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