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책읽기] 2류 기술…포퓰리즘…일본은 침몰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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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본은 몰락한다 (日本は沒落)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지음
아사히신문사, 264쪽, 1300엔

일본이 서서히 쇠락해가고 있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같다. 하지만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原英資)는 그의 화제작 『일본은 몰락하고 있다』를 통해 일본의 쇄락상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너무 비판적으로 지적하다 보니 마치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일본 비판서 같다. 사카키바라는 옛 대장성 재무관 출신으로 1990년대 국제 금융가에서 ‘미스터 엔’으로 불리며 최고의 전문성과 권위를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일본이 몰락한다고 했을까.

가장 큰 원인으로 ‘기술의 몰락’을 꼽았다. 미국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나 하늘의 제왕인 스텔스기도 일제 부품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정보기술(IT) 중심의 ‘포스트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됐다. 이 기간 중 일본 기업들은 구조조정에 매달리며 단기적 이익 실현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적극적인 기술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 버블 경제의 아픈 경험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 한 것이다. 그 대가로 일본 기업들은 컴퓨터·반도체·휴대전화·액정TV·MP3 등 세계를 휩쓸고 있는 첨단제품 모든 분야에서 2등 기업으로 전락했다.

일본은 이런 부진의 원인을 버블 경제의 후유증이나 금융시스템의 불안에 돌리면서 처방전으로 ‘금융 입국’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이 사카키바라의 지적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계 금융회사들이 위력을 떨치자 “일본도 이제는 금융의 시대”라면서 도쿄에 국제금융센터를 구축하기로 하는 등 금융시장을 키우기로 했지만, 미국 경제의 경쟁력은 기술에서 나오고 있다는 그의 분석이다.

저자는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애플의 기술력을 예로 들고 있다. 이들 기업의 창의적인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뉴욕 증권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 등 대형 투자은행이 국제 금융시장을 주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저신용 주택대출) 사태로 미국 경제가 흔들리고 있지만 미국보다는 일본과 아시아 증시의 주가가 더 많이 내린 것도 미국 경제의 저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카키바라는 일본 기업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삼성전자의 변화와 경쟁력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웬 삼성전자 예찬론인가 했더니 설득력 있는 대목이 많았다. 그는 먼저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고 밝힌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철학에 주목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구글이 모두 한 명의 탁월한 지도자나 개발자의 힘으로 도약했듯이 포스트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천재성이 기업 전체의 성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사카키바라는 삼성전자가 뒤늦게 반도체사업을 시작해 원천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들을 제친 것도 일본의 경쟁기업에서 우수 인재를 대거 스카우트해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카키바라는 일본 정치권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내셔널리즘(민족주의)도 일본 쇠락의 원인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아베 신조(安倍晉三)와 같은 편협한 이념주의자들이 경제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치중하는 사이 경쟁국들은 앞서가고 일본은 뒤처지게 됐다는 주장이다.

사카키바라는 이 책을 통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실용보다 이념을 앞세우면 반드시 후유증을 앓는다는 점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일본 사회에 던지는 쓴소리지만 한국의 정치인이 귀담아들어도 될듯 싶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木神原英資·67)

도쿄대와 미시간대에서 경제학(박사)을 전공했다. 옛 대장성에서 출발해 국제통화기금(IMF) 연구원·하버드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대장성 퇴직 후 게이오대 교수를 거쳐 현재 와세다대 인도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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